무협/SF

야담소설가 유관필 - 7부

본문

당가 사람들은 거개가 성격이 급하다. 폭급한 손속의 독왕 당철기의 아들인 당척 역시 그랬다. 마주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진한 온기에 당척은 유관필의 손을 잡은 채로 말했다.




"유 장주, 우리 형제를 맺읍시다."


"네?"


"서로 마음을 통했으니 피가 통한 것이나 뭐가 다르겠소. 형제의 예를 맺었으면 하오."




난데없는 전개에 당황스러웠지만, 유관필 역시 감동에 약한 사나이였고, 유관필 역시 자신의 손을 덮고 있는 커다란 손에 믿음이 갔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없이 감격의 인사를 건내는 것이었다.




"형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럼! 형이라 불러야지. 자네 배는 괜찮은가?"


"네?"


"술을 마실만큼 괜찮으냔 말일세. 이런 날 한 잔이 없어서야 말이 되는가?"


"하하. 그러셔야지요. 그럼, 저희 집으로 가시지요. 익어서 향이 진해진 술이 있습니다."


"아니, 내 집에서 해야지. 이 형이 먼절세."


"실은 예인이가 무턱대고 끌고 오는 바람에, 집에서 걱정을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하. 그런가. 하긴, 그 이야기도 들어야지. 자네가 그 미기의 정인이 되었다는 소리는 나도 들었음이니. 거기, 확이 있느냐?"


"네. 가주님."




밖에서 당척을 기다리고 있던 당가의 총관 당확이 묵직한 대답을 했고, 당척은 유가장을 방문할 것이니 적당한 선물을 하나 들고 오라는 말과 함께, 유관필을 안아들고 석죽산으로 내달리는 것이었다. 얼굴이 따가울만큼 빠른 속도에 유관필은 당척의 억센 팔에 안긴채로도 눈을 뜨지 못했고, 이다경이 되기도 전에 유가장에 다다른 것을 알고서는 해연이 놀랐던 것이다.




"아담한 장원일세."


"정성으로 지었지요. 하하 형님. 그만 내려주시지요. 장원을 한 바퀴 돌며 소개를 해드리지요."


"그럼세."




유관필과 당척의 일행과 제일 먼저 마주친 것은 유가장의 일꾼 명진이었다. 앉아서 막 자라나는 풀을 뽑고 있던 명진이 두 사람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장주 어르신."


"지금 시간이라면 쉬는 시간이 아닌가?"


"이것이 쉬는 것이지요. 뒤뜰은 제 공간이니까요."


"그럼 수고하게. 그리고 여기 이분은 예인이의 아버지로, 내 형님이 되시네. 앞으로 무시로 출입하실 분이니 다음에 뵈어도 예를 갖추게."


"네. 장주님."




인사를 마친 명진이 다시 앉아 풀을 뽑았고, 당척은 명진과 헤어져 어느 정도 거리를 떨어지자 유관필에게 물었다.




"쉬는 시간은 또 뭐고, 저 녀석의 공간이라는 건 무엇인가?"


"이 무렵이 가장 덥지 않습니까. 이런 때에는 일에 능률이 오르지 않아서, 저희 장에서는 이 시간에는 모두 쉽니다. 그리고 자기 공간이라는 건, 저희 장의 총관인 일문이 각자 나눈 자기 땅인 셈입니다. 부리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공간을 준 것입니다. 명진의 공간은 뒤뜰과 세가의 담이지요."


"책임을 지운 것인가?"


"자부심을 채울 공간을 준 것입니다. 이게 명진의 자부심지요. 저기를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유관필이 가르킨 곳은 사랑으로 통하는 대문 옆의 담이었다. 황토벽의 담에 깨알같은 자갈들로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담채화같은 아름다움에 당척이 탄성을 내뱉었다.




"아까 그 자의 솜씨인건가?"


"네. 벌써 달포쯤이 다되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그려가고 있지요. 뒤뜰의 공간에는 명진이와 다른 하인들이 주워놓은 자갈들이 색별로 구별되어 놓여진 작은 창고도 있지요."


"시킨 것이 아닌데도 그리 한단 말인가?"


"유가장에선 모든 사람이 작은 행복을 움켜쥐고 살고 있지요. 별 것이 아닙니다. 명진이는 그저 뒤뜰이 추헌이 관리하는 앞뜰보다 깨끗한 것만으로도 뿌듯함을 느끼면서 사는 겁니다."


"아아. 그런 의미였는가? 대단하군. 대단해."




당척이 자신의 무릎을 치며, 유관필의 사람을 쓰는 법에 관심을 드러내는데, 사랑의 대문이 열리며 린아와 화영이 나왔다. 화영은 그저 고개를 숙였지만, 당문의 시비인 린아는 가주인 당척을 발견하곤 바로 바닥에 엎드려 코를 땅에 박아서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일어서라고 하시게. 나야 이젠 이젠 손님이라고 할 것도 없으니."


"형님. 저 아이는 예인이의 시비입니다. 당가의 아이라, 형님을 알아보고 그런 듯 합니다."


"아 그런가. 일어서라. 나를 알더냐?"


"네. 가주님."




당척이 씁쓸한 얼굴을 하자, 유관필은 해선정으로 당척을 이끌었고, 해선정에 당척이 앉자, 직접 우려놓은 차가 담긴 주전자를 가져와서 한 잔을 권했다.




"형님. 속이 타시면 한 잔 하십시오. 수국차입니다."


"허어. 이런 일을 직접 하시는가?"


"작은 장원이라 손이 모자랍니다.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하는 편이지요. 그리고 여긴 제 땅이니까요."


"아! 여기가 자네의 그 자부심이라는 말인가?"


"아직 소유권 분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총관인 일문과 경쟁하고 있지요. 저기 저 쪽의 나무는 일문이 심은 것이지만, 담은지의 물고기는 제가 채워놓고 있어서요."


"물고기를 채워놓다니. 그건 어떻게 하시는 겐가? 낚시라도 다니는 겐가?"


"그건, 아니고. 유가장 인근에도 사람들이 살게 되다보니, 아이들이 많아서요. 동리의 꼬마녀석들에게 물고기를 사들이고 있지요. 작은 물고기부터 큰 물고기까지 잡아오는 대로 셈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저 작은 연못이 물고기로 가득 차겠네그려."


"석죽산은 물이 너무 맑아 물고기가 잘 없습니다."




당척과 유관필이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데, 안채에 다녀온 화영이 작은 소반에 다과를 담아 가져왔다. 




"화영아. 집사람은?"


"저녁에 독왕 어르신이 오신대서요. 일지 할머니와 저녁준비를 하고 계세요. 그런데, 예인 아가씨는요? 같이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예인이는... 아마도 저녁엔 오겠지. 술을 한 잔 하고 싶은데, 준비해주겠니?"


"네."


"송엽주를 가져오너라."


"송엽주를요? 아직 딸 때가 되지 않았을 텐데요. 일지 할머니가 내주지 않으실텐데.."


"그럼, 알아서 가져오너라."


"예. 장주님."




화영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엌으로 가는 모습을 보며 유관필이 당척에게 물었다.




"형님이 지금 제일 하고 싶으신 일은 무엇입니까? 당장 이루고 싶은 일은 있으신가요?"


"음..."


"필생의 소원같은 것 말고, 어렵지만 하고 싶은 것이 없으십니까?"


"이런 말을 하기에 부끄럽지만, 난 자네같이 되고 싶다네."


"네?"


"내가 말일세. 이 당척이 말이야. 독왕이라 불리는 아버님의 못난 자식이지만 말일세. 당가 삼천 식솔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네. 하루에도 확인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이렇게 자네랑 다탁을 마주하고 있는 것도 실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자네에 대해 꽤나 자세하게 알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아마도 예인이가 이 집에 내내 드나들다보니 알게 되신 게 아닙니까?"


"요즘 당가에서는 자네의 이야기를 모든 사람들이 하네. 성도의 이렇다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자네의 이름은 심심치 않게 들리지. 처음에는 그냥 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젊은 나이에 관직에 올랐다가 끈이 떨어진 관리정도락 생각을 했었네만, 들려오는 소리를 하나씩 주워들때마다 말이지. 자네가 부럽더군."


"아니. 대 당가의 가주님이 이 사람의 어디가."


"자네 집의 밥이 왜 속에 가득 차는지를 예인이에게 들었을 때를 잊을 수 없구만. 아랫 사람에게 그런 마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나. 그래! 하고 싶은 일이 생각이 났네."


"네? 그게 무엇입니까?"


"난 마누라에게 그런 밥상을 받아보고 싶다네."


"형수님께요?"


"우리 마누라는 지봉이었다네. 자네도 이야기책을 봤다면 알테지. 그 칠룡삼봉할때의 그 봉황 말이네."


"그럼.. 혹 제갈 세가 출신입니까?"


"그렇다네. 제갈 세가의 장중보옥이었지. 칠룡에 들지 못했던 내가 강호 삼봉 중 하나를 차지 했을 때의 수군거림들을 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네. 다들 우리가 사랑해서 혼인한 것이 아니라, 당가를 이어받을 어린 소가주였던 나를 꽉 찬 나이의 마누라가 홀랑 집어들었다는 이야기를 했지."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사랑한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쟁취심 같은 거였네. 주변에 너무 사람이 많아서, 어떻게든 가지고 싶었지. 낙점을 받기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었는데, 그것도 모용가의 늙은이나, 화산의 동년배에게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어."


"함께 하셨던 시간이 길었는데, 사람의 마음이야 커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게 말이야. 이 못난 사람이 미망에 사로잡혀 있었잖나. 난 자네가 나를 깨우쳐주기 전까지 내내 만천화우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네. 젊은 날엔 만천화우에, 나이가 제법 들고나선 삼천 식솔을 먹여살리는 입장이 되다보니 정을 키울 시간이 없었네."


"제가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돕고 싶은데요."


"아내는 말이야. 엄청나게 재지가 뛰어난 사람이라네. 본인의 성취가 높다보니 아버지의 무공에 미치지 못하고 늘 치이기만 하는 자기보다 어린 날 언제나 어느정도는 무시를 하네. 난 그게 예전부터 싫었네. 아마 내가 아내에게 진심으로 몰두하지 못한 건, 그런 탓일 수도 있어. 난 존경을 받고 싶다네. 그래. 내 솔직히 말함세. 난 강호에 내 이름을 떨치고 싶다네. 솔직히 그게 아니면 무엇이든 시시할 것 같아. 성취할 수 있는 작은 꿈도 크지만, 난 커다란 꿈이 더 좋다네."




잠시 고민하던 유관필이 조금 어두운 얼굴을 하더니, 앞에 놓인 다식을 하나 집어 어금니로 질끈 씹으면서 당척을 보며 말했다. 




"생각했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독공자 당민이라는 기담집을 읽고 있다가요. 예인을 통해서 당가의 일을 듣다가도 내내 마음에 걸리던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해치는 일이라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형님의 일이니 제가 한 손을 거들죠."


"무슨 말인가?"


"당가는 독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독공자 당민을 쓴 월영산인도 독의 쓰임새를 알지 못하더군요. 형님, 마교 교주를 독살하는 건 어떻습니까? 형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제가 형님의 이름으로 마교 교주를 독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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