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SF

야담소설가 유관필 - 2부

본문

당예인의 눈이 남자를 향하는 것이 아닌,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발견한 오세인이 눙치듯 다짐을 받았고, 아직 어린 당예인은 그런 오세인의 다짐을 공자님 말씀을 듣는 학당의 학생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했다. 그제야 한숨을 돌린 유관필이 당예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처녀는 여기 유가장엔 어쩐 일이오. 더구나 말을 타고 온 나보다 일찍 도착하다니 도무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세계요."


"상공, 남의 집 귀한 딸래미에게 처녀라니요. 당여협이라고 부르세요."


"아, 그런 것이오. 내가 책상물림이라 그쪽으론 지식이 전혀 없다오. 미안하오. 당여협."


"여협이라니요. 아직 이름도 못낸 처지에요. 전 선생님의 제자가 될 요량이니 그냥 예인이라고 부르세요. 그런데, 언니 저 밥 좀 주시면 안될까요? 마구 달렸더니 배가 고파서요."


"그럴까. 그럼. 상공도 손을 씻으시고, 오세요. 예인이도."




화영을 불러, 식사를 준비하러 오세인이 주방으로 간 사이, 유관필이 휘적휘적 큰 걸음으로 우물가로 걸었고, 당예인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병아리가 어미닭을 따르듯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당예인은 궁금한 게 얼마나 많은지 한 걸음에 두세가지 정도의 질문을 해댔는데, 별 질문도 아닌 것이 아들은 어디 있느냐. 누굴 닮았느냐 같이 식사자리에 아들인 경민이가 오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질문에서부터. 아까 다과점에서 앵앵을 어떤 식으로 꼬드겼느냐 같은 오세인이 들어서 날벼락이 떨어질 질문까지 쉴 새없이 물었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유가장이 높고 날카로운 당예인의 목소리로 가득했지만, 여동생이 없었던 유관필은 그저 당예인이 귀여워서 당예인의 많은 질문에 하나하나 모두 대답을 해주는 것이었다.




"선생님, 그런데요. 경사에선 무슨 일을 하셨어요?"


"경사 동부 시전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오."


"와. 그럼 과거에도 입격을 하셨겠네요?"


"그렇다오. 스물 다섯에 대과를 통했지요."


"선생님. 경사는 사람이 많지요?"


"여기에 오니 모두들 경사를 궁금해 하지만, 실은 성도도 어디 못지 않게 번화한 곳이라오. 사천의 모든 물류가 모이는 곳이니 경사에 뒤지질 않소."


"천자 폐하는 어떻게 생겼어요? 잘 생기셨나요?"


"실은, 과거에 입격해서 어사화를 받을 때 한 번 뵐 기회가 있긴 했는데, 건방지게 보이면 어떻게 할까 싶어서 납작 업드려서 있느라고 얼굴은 보지 못했다오. 목소리는 기억하고. 나직하고 무거운 목소리셨다오."


"하하. 진짜요. 하긴, 우리 할아버지도 무공으로 치면 사천에서 제일이시거든요. 당문의 무사들도 우리 할아버지 앞에 가면 납작 업드리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이랑은 잘 안 어울려요. 선생님은 낮은 자에게 부드럽고 높은 자에게 당당한 그런 분처럼 보였거든요."


"당여협이 못난 사람에게 금칠을 해주시는구려."


"말을 편하게 하세요. 선생님. 그런데, 저녁은 맛있는 게 나올까요?"


"속이 차는 한 끼일거요. 우리 집은 정성제일주의니까."


"네?"




손을 닦고 나란히 걸어오는 두 사람은 마치 나이차가 적은 부녀사이 같아서 보기가 좋았다. 안채의 큰 방엔 긴 식탁이 있었는데, 열 두 사람이 앉을 수 있었고, 거기엔 유가장의 일을 봐주는 남자 하인들 셋과 찬모와 침모, 그리고 오세인의 개인시비인 화영, 그리고 오세인의 품에 앉아있는 관필의 아들 경민이 이미 앉아 있었다. 




"앉으시오. 아, 부인 그런데 왜 다들 양들이 작소?"


"아, 상공이 사다주신 떡들을 모두 먹은 모양입니다."


"대인 어른, 진짜 맛있었습니다."


"맛있었습니다."




떡에 대한 치하가 한참이나 이어지는 동안, 당예인은 어디에서도 하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해있다가 자신을 까만 눈으로 뚫어지게 보고 있는 경민이를 발견해내고는 꽃이 활짝 피는 것같은 미소를 날렸다.




"어머나, 언니, 이 아이가 경민이에요? 예쁘게 생겼네. 몇 살이에요?"


"다섯 살."


"안녕! 난 당예인이야. 앞으로 매일 올지도 모르니까, 잘 부탁해. 그리고 언니 잘 먹을게요."


"그래. 먹자."




별다를 게 없는 밥에 반찬들이었는데도, 정말로 한 그릇을 비우자마자 입이 달고, 속이 차는 게 느껴졌다. 정말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당예인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언니, 진짜 맛있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맛있죠?"


"응, 우리 일지 할머니 때문이지. 할머니는 우리집 양반을 너무 좋아해서 남편도 버리고 왔거든."


"예?"


"그 밥 말이야. 알갱이 하나하나가 같아. 보풀이나 티끌같은 걸 골라내는 정도가 아니라, 깨지거나 모양이 다른 쌀알들을 모두 골라내는 거야. 밥을 짓는 물도 새벽에 일어나서 해가 약수터에 막 뜨려할 때 떠서 하루를 묵혀서 웃물로만 짓는 거야. 그만큼 정성이 들어간거야. 오해는 하지마, 할머니 남편은 내일쯤 올거야. 할머니만 선발대로 우리랑 같이 내려왔거든. 그러니 예인이도 할머니께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해."


"언니. 일지 할머니가 혹시 저기 앉아있는 찬모 할머니를 말하는 거예요?"


"응."


"언니, 전 좀 생각을 해봐야겠어요. 할머니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당예인은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잠시잠깐 봤지만, 몹시도 친근하게 굴던 당예인이었기에, 아마도 식사를 마치고 나면 이런저런 정담을 나눌 것이라고 생각하던 오세인은 당예인이 시무룩한 얼굴로 감사의 인사만 한 채로 밤을 달려 자기의 집인 당문으로 돌아가버리자 유관필에게 물었다.




"상공, 상공은 예인이가 왜 저런지 알고 계세요?"


"아마 가치관의 혼란이 일어 그런 것일 거라오. 옳은 일이고, 사리에 맞고 정당한 일이라고 해도, 그게 익숙하지 않으면 불편하기 마련이라오. 우리 집이야 애초에 이리 살아왔으니 어색하지 않지만,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상하를 당연시하며 살아온 당씨 처녀에겐 어려운 일일 것이오. 하지만, 본바탕이 선량하니 곧 다시 올 것이오. 하하, 어찌나 조잘거리던지 심심하진 않을 듯 하오."


"그러게요. 상공도 저도 형제가 없어서 외로웠는데, 꼭 동생이 생긴 듯 하여 좋습니다. 경민이에게도 누나가 생기는 일이니 좋을 것이고요. 그런데, 당문일가라면 사천당가라는 소리인데. 옷이 여간 고급스럽지 않았어요."


"확실하지는 않은데, 적손인듯 하오. 아까 들었는데, 할아버지의 무공이 사천 제일이라 하더이다."


"독왕 당천기의 손녀라고요?"


"유명한 사람이오?"


"네."




아내의 얼굴이 놀랐다가 곧 지긋하게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바뀌자, 조금 질투가 난 유관필이 투덜거렸다.




"허어, 부인. 어찌 다른 사내를 떠올리며 그런 얼굴을 하는 것이오."


"상공, 독왕 어른은 제 사부님의 사조님이세요. 이미 여든이 넘으셨다구요."


"내 화산기담에서 읽은 적이 있소. 그런 사람들은 여든이든 아흔이든, 청년들보다 힘이 좋을 것이 아니오. 다시 어려지는 경지도 있다고 들었소."


"그런 건 기담집에서나 있는 이야기입니다. 반로환동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아요. 화경에 오르면 평소보다 젊어지긴 하지만, 아주 어려지거나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물론, 힘은 엄청 세겠지만요."


"세책방의 주인에게서 들었는데, 부인은 내공을 움직일 수 있소?"


"네."


"그럼 부인은 이류의 무인이었구려. 대단하시오. 나 같은 건 그냥 단박에 때려눕히시겠구려."




갑자기 오세인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어떤 말 때문에 오세인이 저러는 지 몰라서 유관필은 이유를 모를 때 무조건 통하는 행동을 했다. 오세인을 가만히 품에 안고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말했던 것이다.




"이런, 내가 또 부인을 서운하게 했구려. 미안하오."




오세인이 유관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공, 다른 이는 모르지만, 상공은 제게는 힘이 제일 센 분이세요. 전 상공이 따뜻한 시선을 거두기만 해도 심장이 멈춰버리는 여자니까요."




바람이 드는 지 장지문이 떨렸다. 자신의 품에서 떨고 있는 아내의 고백에 유관필의 심장도 떨렸다. 유관필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앞에선 바람앞의 등불같이 떨릴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천의 지배자라던가, 독의 왕이라던가 당철기를 부르는 호칭은 여럿이지만, 실상 당철기는 그저 고지식한 노인일 뿐이다. 새벽이면 일어나서 그의 상징이 된거나 다름없는 녹의 장포를 입고서 천천히 넓은 당문을 한바퀴 걸은 다음, 아침을 먹고, 내공을 수련하고, 키우는 독물들을 살핀다. 그런 후에는 현 가주이자, 자신의 아들인 독룡 당권을 찾아 차를 한 잔 나누며, 가문의 대소사를 살핀 후, 손자손녀들을 찾아 무공을 지도한다. 흥이 나면 손속을 나누기도 했지만, 대개는 연무를 보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선에서 그친다. 저녁을 먹은 후엔 좋아하는 책들을 읽는 소박한 삶이 사천에서 제일 가는 사내의 일상인 것이다. 벌써 수십년을 이런 채로 살아왔기 때문에, 당철기가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은 당가의 문 안에서 살고 있는 오백여 명의 사람들에겐 대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불평이 많고 까탈스러운 성격의 당철기이기에 당철기가 자신의 처**던가 전각을 돌 시간에는 바짝 긴장하는 것이 당가 사람들의 강요된 성실의 기간이었는데, 벌써 이틀이나 아침 순찰을 거른 당철기 때문에 사람들은 걱정이 많았다. 무공이 신화경에 이른 당철기가 아플 리는 없었다.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잠행이 끝이난 후엔 당가에 큰 변화가 생길 거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추측이었다. 




독왕전이라는 멋드러진 편액은 당철기가 직접 향나무를 깎아 손가락으로 눌러쓴 육필이었는데, 그 멋진 휘호가 걸린 전각의 큰 방에 누워 당철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괘씸함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예인이 이럴수는 없는 거였다. 할아비가, 그것도 정말이지 손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집안의 기둥을 뽑아서라도 모든 것을 해줬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벌써 당예인이 독왕전을 찾지 않은 것이 나흘이 지나고 있었다. 괴팍함과 자존심이라면 당대 제일인 당철기였기에 괴씸한 손녀를 불러들이라 하지는 못했고, 마음을 자꾸만 쓰다보니 속탈이 나고 만 것이다. 




그 아이가 그럴 리 없어. 열흘이면 이레는 찾아와서 오늘 무엇을 했다 조잘거리던 곰살맞은 아이가 아닌가. 무슨 탈이 난게야. 혹시 아픈가. 마음이 급해진 독왕 당철기는 끙하고 무릎에 손을 집고 일어나서 기지개를 편 후, 자신의 시비를 불렀다.




"예인이가 어디 아픈 것이냐? 왜 이리 소식이 없어."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는 듯, 후련한 얼굴을 한 시비 영현이 지체없이 대답했다.




"예인 아가씨는 지금쯤 아마 유가장에 갔을 것입니다."


"유가장? 광동의 유가 말이냐? 그 아이 나이가 몇인데, 벌써 강호를 출입시키는 것이냐. 생각들이 이리 없어서야. 앞장서거라. 내 가주를 봐야겠다."


"태상 가주님. 광동이 아니라 석죽산 옆자락에 새로 생긴 유가장입니다. 세가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그래? 혹, 예인이에게 어떤 망할 놈의 놈팡이라도 생긴 것이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당철기의 말에 푸훗하고 웃음이 터졌지만 겨우 참고 시비 영현이 그동안의 정황을 말하기 시작했다. 당철기에게 당예인의 근황은 늘 궁금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예인이 어디서 뭘 했는가를 알아두는 것도 당철기와 오랜 시간을 보낸 전담시비 영현의 일이었다. 




"유가장은 경사에서 관리를 하다가 낙향한 유관필이라는 자가 세운 장원입니다. 무인은 아니고, 부인과 아들이 하나 있는데, 부인 쪽은 당천혜님의 제자이긴 한데, 수준은 이류정도입니다. 아가씨와는 세책방에서 만난 인연으로 알게 되었는데, 아가씨가 선생님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세가 쪽에서 조사를 해본 결과, 유관필은 과거에서 방안을 할 정도로 학식이 있는데다, 그 인품이 놀라운 자였습니다. 실제로 사천으로 온 지가 겨우 한달 무렵이 되었을 뿐이지만, 교분을 나누는 인사들이 벌써 백 명에 이르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모두 극찬을 하고 있습니다."


"너도 보았느냐?"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몇 가지 일을 들었습니다. 실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대단한 사람이라니."


"석죽산을 아시겠지만 식생이 거의 없어서, 누구도 살지 않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마을이 생겼습니다."


"그 자가 돈이 많더냐?"


"처가가 영풍상단이라고 중견규모의 상단이온데, 처가 무남독녀 외딸인지라 여축이 있지만, 직접 마을을 만든 건 아닙니다. 마을이 생긴 건, 경사와 사천에서 그를 그리워하고 애모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호오."


"나이의 많고 적음, 신분의 상하를 따지지 않으면서도 늘 사리에 맞게 행동하고, 사람에 대한 애정이 많다 합니다. 심지어 하인들과 함께 같은 음식으로 식사를 한답니다."


"어찌 그럴꼬. 하인들도 불편할 것이 아니냐. 자신의 주인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유가장에선 좀 다른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에게 예인이 빠져서, 이 늙어가는 할애비는 모른 척 다닌단 말이지."


"원래 예인 아가씨가 뭐 하나에 빠지면, 거기에 몰두하는 편이시니까요."


"석죽산이라고 했겠다."




당철기는 미루는 성격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당철기가 눈 앞에서 사라지자, 시비 영현은 웃으면서 당철기가 누워있던 침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별 일이야 있을까. 그저 할아버지의 질투일 뿐인데.




그 시각, 당예인은 유관필의 아들 유경민을 오세인을 대신해서 보고 있었다. 요즘 당예인은 눈만 뜨면 유가장으로 찾아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세끼를 모두 해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유가장의 식솔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쁜데다 어리고 밝은 당예인을 모두 좋아했다.




"누나가 뭐랬어. 여기서 이렇게 움직여야 한다니까."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돼요."


"좀 불편하더라도 하루에 반각은 꼭 연습을 해야 해."


"엄마는요?"


"언니는 화영이 찬모 할머니랑 시장을 다녀온다고 갔어. 맛있는 걸 사온대."


"와. 저기."




포동포동한 유경민의 볼이 빵빵해지면서 놀라 하늘을 바라보자, 당예인도 고개를 돌려 유경민이 바라보는 곳을 보았다. 독왕 당철기, 자신의 할아버지가 하늘을 날아오고 있었다.




"어디 있는게냐?"


"누구요?"


"할애비도 모른 척하고 요즘 네가 폭 빠져 있다는 그 녀석 말이다."


"또 왜 그러세요."


"어디 있느냐고."


"선생님은 일문 아저씨랑 담은지에 낚시하러 가셨어요."


"선생님은. 무슨. 그 자가 네게 뭘 가르치는 것이냐?" 


"세상을 보는 방법이랄까요.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건지를 배우고 있죠."


"그런데, 이 아이는 그 녀석의 아들인게냐?"




하늘을 날아와서 자기 앞에 선 당철기가 신기했던지 큰 눈을 뜨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경민을 그제야 발견한 당철기가 뚱한 표정의 당예인에게 물었다. 자신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를 거의 처음 본 당철기 역시 신기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경민이는 선생님 아들이세요. 경민아 누나 할아버지야 인사해야지."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유경민입니다."


"몇 살이냐?"


"다섯 살이요."


"잠깐만."




당철기는 습관적으로 유경민의 손목을 낚아채서 완맥을 잡았다. 그리고는 곧 실망한 얼굴을 했다. 




"근골은 보통이구나."


"또 왜 그러세요. 경민이는 무림인이 될 것도 아닌데요."


"네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 유운보가 아니냐? 무림인이 될 것도 아니면서, 왜 보법을 가르치고 있어."


"그건 언니가 부탁을 해서요. 세상이 흉하니 신법을 좀 가르쳐 달라고요. 유운보가 다른 건 몰라도 속도와 유연성은 제일이니까요. 도망치는 법을 가르치는 거예요."


"무인이 되어서 도망치는 법을 가르치다니. 내가 헛일을 했다는 말이냐. 먼저 손을 쓰는 것이 무인이다. 그 말을 잊지는 않았겠지."


"아, 할아버지 전 이제 무인이 아니에요. 엄마랑은 이야기를 했는데, 아직 아버지께는 말씀을 안드렸거든요. 하여튼, 전 이제 무인의 삶을 살지 않기로 했어요."


"그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그 선생이라는 작자가 네가 그런 마음을 가지게 한 것이냐?"




폭급하다해도 좋을 자신의 할아버지 당철기의 성정을 잘 알고 있던 당예인은 일단 할아버지의 화를 풀어줘야 할 필요를 느꼈다. 당예인은 그때까지도 신기하게 당철기의 이곳저곳을 훔쳐보던 다섯살 바기 유경민을 번쩍 들어안고는 사랑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지 마시고요. 할아버지, 사랑으로 가서 차나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하세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랑 저랑 이야기도 한참이나 못했잖아요."


"그거야, 네가 이집 놈팡이의 꾐에 빠져 할애비를 전혀 찾지 않으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냐. 그래, 가자. 가서 일단 네 이야기를 듣고, 물고를 내는 건 그 때해도 늦지 않으니까 말이다."




아무렇지 않게 생면부지의 사람을 물고내겠다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왜 예전엔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는지 잠시 생각하던 당예인은 마치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유가장을 걸었다. 그런 자연스러운 모습에 기분이 나빠진 당철기가 투덜거리려던 순간에 이상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원에서 사랑으로 가는 곳에 몇 명의 사람이 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자신이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담은지라는 곳이 여기였느냐?"


"네."


"이 할애비를 속인 것이냐. 그런데, 왜 저 영감탱이가 여기 있는 것이냐?"


"아, 적송자 할아버지요? 민폐에요. 민폐."


"저 늙은이가 이곳을 주목할 정도로 이곳에 무슨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이냐?"


"선생님 때문에 유가장에 오시긴 하셨는데, 그 때 제가 확실히 반대를 하지 못해서요. 그때부터 눌러 붙어 계시거든요. 제가 언니를 통해서 어떻게 내보려내려고 작업중이긴 한데, 이미 사랑채에 자기 방까지 가지고 계시거든요."




궁금한 것이 엄청나게 많아진, 당철기는 끓어오르던 화도 어느새 가라앉았고, 화보다도 유가장이라는 곳 자체를 매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사랑채의 규모는 작았지만, 몸을 뉘일 곳만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하지 않고 살아온 인생이었다. 앞 뒤로 튼 대청은 시원했다. 바람이 살살 불어서 더위를 식혀줬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당철기가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져야할 문제의 유관필을 노려보다가 당예인의 치맛자락을 잡고 있던 아이가 제 아비에게 뛰어가는 것을 봤다. 당예인은 어지간히 이 집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작은 소반을 꺼내오고, 또 어디서 가져오는 것인지 방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차주전자와 찻잔을 꺼내오는 것이었다.




"누가 보면 네가 안주인인 줄 알겠다. 그래, 저 늙은이는 왜 여기 있어."


"적송자 할아버지가 소문을 들으신 거죠. 유가장 밥맛이 최고라는 걸 어디서 들으셔 가지고, 불문곡직 쳐들어온 거에요. 할아버지랑 비슷하죠. 적송자 할아버지도 담을 넘어서 오셨거든요."


"아, 이곳에선 하인들이랑 같이 식사를 한다면서? 그건 또 왜 그런 것이냐?"


"선생님 뜻이 그러세요. 사람은 누구나 같다고요. 하는 일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누구나 소중한 자기만의 삶이 있는 거죠. 그리고 유가장의 담 안에선 모두가 식구니까요."




하는 일에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자기의 삶은 소중하다는 말엔 현기가 깃들어 있었다. 멍청한 표정으로 낚시대를 드리운 저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남자가 그래도 제법 속이 차 있음을 확인한 당철기가 천천히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놀랐다.




"이 차는 무슨 차냐?"


"놀라실 줄 알았어요. 일지 할머니 솜씨는 최고니까요."


"일지 할머니라니?"


"유가장의 찬모 할머니세요. 사실, 그 차는 선생님만 마시는 건데, 제가 할아버지 드리려고 선생님 방에서 몰래 훔쳐온 거거든요. 고맙게 드시라고요."




아무리 자신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자신의 손녀 당예인이 남의 물건을 그렇게 훔쳐올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당철기는 당예인이 유가장에 출입한 시간에 비해 대단히 친숙한 사이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왠지 입맛이 썼다. 헛헛한 할아버지의 마음도 모른 채, 당예인은 유가장 자랑에 정신이 없었다. 씁쓸한 마음에 다시 찻잔으로 손을 가져가는데, 숨을 헐떡거리면서 누군가 뛰어왔다. 손녀의 개인시비인 린아였다. 




"아가씨! 아, 태상가주님도 계셨네요."


"무슨 일이야? 언니는?"


"빨리 가셔야 해요. 늦으면 다 없어지고 말거든요. 적송자 어르신이.."


"아! 가자. 이 할아버지가 또. 할아버지 잠깐만 기다리세요."




린아를 들쳐업은 손녀 당예인이 경공을 써서 최고속도로 내원으로 달려가다가 다시 돌아와 꼬마 경민이를 다른 한쪽 어깨에 들쳐 메고는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본 당철기가 차마 내원으로 따라가진 못하고 차를 마저 마신 후 적송자가 사라진 담은지에서 여전히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는 유관필에게 다가갔다. 당철기가 가까이 다가서자, 유관필이 일어나 인사를 건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예인이의 할아버님이시라죠. 유관필입니다."


"아, 당철기라 하네.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나."


"예. 그러시죠. 다른 분도 아니고, 예인이의 할아버님이신데요."




담은지의 옆엔 해선정이라고 휘호가 붙어있는 정자가 있었다. 




"자네의 필적인가?"


"네. 졸필이지요."


"아닐세. 꽤나 보기가 좋구만. 공부가 깊은 모양이네."


"아닙니다. 허명을 쫓아 되지 않은 노력은 꽤 했습니다만, 깊은 공부가 되진 못했습니다. 낙향을 하고 나서야 헛일을 한 건 알게 됐지요."


"왜 사천에 온 것인가?"


"그냥, 경사에서 좀 멀리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처가가 이곳에 있기도 해서요."


"그 이야기는 들었네. 상단을 하신다지."


"장인어른도, 장모님도 돌아가셨습니다. 상단은 도와주시는 분들에게 맡겨두고 있습니다."


"그런가. 아픈 곳을 이야기했다면 미안하네."


"아닙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무공으로 사천에서 제일이시라고요. 사실, 성도에 내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전 무림이라던지, 무공이라던가 하는 건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기담집 같은 것을 읽게 되었는데, 참으로 대단해서 많이 놀랐습니다."


"허허. 기담집이라. 나도 소시 적엔 꽤나 읽었었네만. 그런데, 예인의 그 말은 무엇인가. 무림인으로 살지 않겠다고 하던데, 자네가 무슨 말을 한건가?"


"제가 입을 잘못 놀려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을 했던가. 자네를 직접 보니, 자네가 쓸데 없는 말을 할 사람이 아닌 것 같아 하는 말이네."


"저도 아내도 모두 예인이가 동생같아 예쁩니다. 저희 아이도 예인이를 누나처럼 따르고요. 그런데, 저 예쁜 아이가 기담집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사람을 해치고 손에 피를 뭍히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요. 그래서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것을 감당할 수 있겠냐고요."


"예인이가 치워야 할 것들은 사람이 아니네. 사마외도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고, 돈을 뺏고, 여자들을 착취하는 그런 자들이라는 말일세."


"좀 이기적인 생각 같지만, 그런 자들을 치우는 것을 꼭 예인이처럼 꽃다운 아이가 해야할 필요가 있을지요. 그런 일은 힘이 더 센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인 듯 합니다."




꽤 단호한 유관필의 대답에서 당철기는 두가지를 보았다. 하나는 유관필이라는 이 젊은 사내가 삿된 감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이 목숨만큼이나 아끼는 손녀 당예인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림을 아예 모르는 이 순진한 사내를 설득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조심스럽지만 편하게 대하는 유관필을 보며 미처 알지 못했던 다른 점을 알게 되었다.




화경에 오르고 나서는 자신을 이렇게 편하게 대하는 사람이 몇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초절정에 이른 자신의 아들인 가주조차도 당철기의 위엄에 긴장을 했었다. 기세라는 것이 있다. 손녀 당예인이야 원체가 스스럼없는 아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이 집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편하게 대했다. 무공을 아예 익히지 않아서 그런건가라고 잠시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기세를 일부러 감추지 않으면, 사람이 아무리 있어도 당철기의 주변 삼장만큼은 늘 사람이 없었었다. 그 다섯살짜리 꼬마도 그렇고, 유관필도 그렇고 특이했다. 유가장과 유관필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진 당철기가 물끄러미 담은지를 바라볼 때였다. 한 떼의 사람들이 정자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꼬마녀석을 안고 있는 걸 보니 유관필의 내자인 듯한 여인이 보였고, 그 옆에는 대나무 채반에 가득담긴 전을 들고 있는 시비와 예인의 시비 린아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신의 손녀는 입가에 기름칠을 한 적송자와 다투다가 당철기와 눈을 마주치자 환하게 부서질 듯한 얼굴을 하며 웃으며 팔을 크게 흔들며 할아버지를 외쳤다. 손녀의 저런 얼굴을 처음 본 당철기는 저것이 바로 행복한 얼굴이라고 느꼈다. 




적어도 당철기의 기억속에서 자신의 손녀가 저토록 아름다웠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환하게 피어나는 꽃같은 당예인을 보며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관필의 부액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즉각 기를 곧추 세워서 정신을 회복한 독왕이 유관필에게 한마디 말을 던졌다.




"그럼, 이만 나는 가겠네. 손녀가 잘 있는 걸 봤으니 되었네."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요."


"아닐세. 예인이 말을 들으니, 한끼 밥을 짓는데, 부단한 정성이 들어간다 하는데, 이 늙은이가 끼게 되면, 식사가 부실해지거나, 누군가 못 먹는 사람이 생기지 않겠나.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늙은이 자존심 하나로 팔십 년을 살았네. 자리를 가리는 것은 내 자존심일세."


"네."


"대신, 저녁에 옴세. 괜찮은가?"


"유가장은 언제나 열려 있지요. 기꺼이 맞겠습니다."


"그럼 나는 가네."




당철기는 들어올 때처럼 담을 뛰어넘어 당가로 돌아갔는데, 담은지에 어린 물안개를 헤치며 날아오른 당철기의 모습은 아름다워서 모두의 감탄을 샀다. 관필의 아들, 경민이가 눈을 반짝이며 누나이자, 자신의 사부인 당예인에게 물었다.




"누나, 나도 열심히 연습하면 저렇게 하늘을 날 수 있어요?"


"그럼. 열심히 해서 안되는 일은 없으니까. 그런데, 할아버지가 어디에 가시는 거지. 선생님! 저희 할아버지 어디에 가신대요?"




담은지에 드리워놓았던 낚시대를 수습하고 있던 관필이 사람좋은 웃음을 띠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응, 어르신은 저녁 때 다시 오시겠대. 갑자기 온 거라서 점심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거라면서."


"아휴. 할아버지는 꼭 그렇게 예의를 차리신다니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죠? 언니?"


"그렇지. 예인이 할아버지신데, 일지 할머니께 저녁엔 제대로 먹자고 부탁을 해야겠네."


"하긴, 우리 할아버진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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