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물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19부

본문

나는 참 이해가 안 가는 게 말야.”




어려운 문제라기보단 알 수 없는 문제를 들추어보는 것처럼 선영은 약간 눈을 내리깔고 스스로에게 던지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성진은 반쯤 몸을 일으킨, 즉 한쪽 팔로 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자세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꽤나 불편한 자세였지만 그에게 있어선 똑바로 일어나 앉기란 행동을 수행할 여유조차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눈과 정신은 온통 몇 발자국 떨어져있는 선영에게 집중돼있었다. 정작 당사자인 선영은 성진을 보지도 않고 있었지만 말이다.




“세상에 죽어야 할 목숨이란 건 없다는 공익광고 같은 문구야. 희망도 없고 기회란 기회는 모조리 소진했고, 가진 것도 없는 자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의미가 없지만 그런 사람도 살아가야 한다고 모든 사람들은 외치지. 으응, 아니, 대부분이라 정정할까? 어쨌거나… 세상은 아직도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다나? 어째서일까?”




마주하진 않았지만 선영의 눈동자는 빨려들 듯한 아름다운 갈색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진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 눈동자 속에는 보통 사람들이 간직할만한 부드러운 생기가 없었고, 날카로운 기계 같은 빛만 서려있었기에.




“어째서라니….”




잠깐 말이 끊어진 틈을 타서 성진이 뭐라도 얘기해보려던 찰나 그녀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마치 성진이란 존재는 있으나마나인 것처럼.




“인간이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답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모두들 살아가려고 악착같이 발악하지. 수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해 정진하는 이들, 열심히 돈을 벌어서 더 윤택한 생활을 누리려는 이들,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을 더욱 발전시켜나가는 이들…. 그래.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를 내세우고 그것을 견지하기 위해서 인생이란 시간을 보람차게 설계해가. 정말 웃기는 일 아냐? 한발자국만 더 먼 곳에서 바라보면 참으로 부질없는 것들인데 말야.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차라리 신이 존재해서 우주의 역사적 사명이라도 내려준다면 그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종교라는 것을 염두에 두더라도 그것들은 모호해. 검증을 찾을 수도 없어.”




바람이 불며 앉아있는 선영의 머리칼을 한쪽으로 쓸어내고 있었다. 목 언저리까지만 내려오는 길진 않은 머리칼이었으나, 그 머릿결은 미려했고 살아있는 것처럼 찰랑거려 그녀의 얼굴 앞으로도 몇 가닥이 하늘거렸다.




“그래… 인간은 모두 나약한 존재야. 깊은 지식은 인간을 오히려 약하게 만들어. 그들은 그것에 파고들면 안 돼. 그보다는 눈앞의 ‘더 나은’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발버둥치고 괴롭더라도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이 생(生)에 도움이 되지.”




그리고 선영은 갑자기 눈동자를 들어 성진을 바라보았다. 성진은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을 느꼈으나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지금으로썬 정면으로 맞붙어도 부족할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말야.”




“…….”




“그렇게 할 수 없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흡입력 좋은 이 빌어먹을 정도로 천재적인 뇌가 모든 지식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려하지 않지. 그 누구도 더 이상 신경쓰지 않으려 하는 삶의 의미와 죽음이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 너무 심해. 더 나쁜 것은… 그래. 참 이상할 정도로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너라면 알겠지만 고개를 돌리게 해줄 기제가 존재하지 않아. 내가 사라지는 데 걸리는 게 뭐가 있지? 나를…….”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성진은 특유의 날카로움으로 그녀의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것은 생명이라면 무릇 간직해야 할 슬픔, 혹은 쓸쓸함이다. 비록 죽음이란 심연 속에서 돌아나온지 얼마 안 된 본래의 선영이지만 그 감정은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성진은 그 한가닥 희망을 붙잡기로 다짐했다. 물론 그 다짐을 제대로 정립하기엔 너무도 협소한 시간이었으나.




“이런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가 사랑해줄게.”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지막하게 건네는 성진의 말. 이어지듯. 침착하게. 진심을 담아서.




선영은 생긋 웃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왜였을까…. 성진은 가슴 한구석이 갑자기 저릿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성진 그 자신을 감싸는 어떠한 감각적. 알 수 없는 직감을 받고 나서 반사적으로 전달된 그 무언가의 신호와도 같았다. 형연할 수 없는 그 느낌을 받은 성진은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그것은… 선영의 미소 때문이었다.




다시는 못볼 것 같은, 아름답지만 슬프도록 시린 미소.




이어서 스르르 일어서는 은선영. 그녀의 동작은 마치 마법을 연상케하는 듯 성진을 옭아매었고, 그 옭아맴은 이제 와선 어떤 동작으로도 풀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성진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선영은 천천히, 하지만 그 어떤 제지도 완강히 거부하는 뉘앙스를 품고 있었고 성진은 감히 그런 그녀에게 다가갈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드럽게 몸을 돌리는 그녀. 도대체 뭐지…? 정말로 마법이라도 사용했나? 마법… 그것은 판타지 세계에서나 나올 법한 웃기는 것이잖아?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김성진! 눈앞의 그녀가 다시 옥상 난간쪽으로 걸어가고 있잖아? 시간이 없어! 한시라도 빨리 제지하라고! 조금 전에는 번개같이 움직였던 그녀였고 넌 그 짧은 순간도 포착해서 붙잡을 수 있었잖아?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왜 붙잡지 못하는 거지? 이게… 이게 왜 이런 거야? 이 멍청한 녀석아! 넌 왜 아직도 옥상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거냐?




‘알고 있어….’




성진 그 스스로에게 대답하는 그의 머릿속.




‘그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난… 그래. 그녀에게 납득당해버린 거야. 혹은 어떤 말로도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거야. 그렇기에… 그렇기에 그녀를 잡을 당위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란 것을. 이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놓아주는 것…….’




뺨으로 흘러내리는 그의 눈물.




‘그래…. 그녀는 현세를 살아갈 사람이 아니야. 인간의 탈을 쓴 다른 존재. 차원이 다른 존재…. 그녀에게 있어선 괴로운 현실을 탈피하는 쪽이 옳은 선택. 따지고 보니 아주 당연한 것이군. 보통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세계까지 갔다온 그녀란 존재에게 가보지도 않은 사람이 명령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 그렇잖아……?’




그리고 흘러내린 눈물이 턱을 타고 한방울 툭 떨어질 때.




‘이젠 그만…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하게 해주자.’




선영은 느릿느릿 옥상 끝으로 걸어가서 잠시 난간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올라타고 떨어져 한번 죽음을 경험하게 했던 바로 그곳이 다시 목하에 있었다. 그 당시에는 죽음이란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직전의 ‘인간’이란 감정에 많이 의거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도 발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선영에게 있어선 무덤덤하기까지 한 감정이 들었다. 선영은 갑자기 픽하고 웃고 싶어졌다. 이곳을 봐도 별 감정의 동요가 없다니. 정말 난 이젠 현세를 살아갈 사람이 아니군. 끔찍한 고통이 다시 온몸을 뒤덮을테지만 진저리나는 무게는 현실을 계속 살아간다는 쪽에 치중돼있어. 그러니까 나는….




“죽지 마!”




그녀의 생각 끝에 급작스럽게 파고드는 어떤 목소리.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악을 쓰듯 외치는 그 소리는 등뒤의 별 관계도 없는 성진의 목소리였기에.




…정말 질리는 남자로군.




“죽지 마!”




두번째의 외침. 이번엔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처절한 음성. 선영은 난간에 손을 짚은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붉어지고 이마엔 핏줄이 튀어나왔으며 걷잡을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그냥 방치한 덕택에 성진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으나 그에게 있어서 그런 사실은 별로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 듯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산들바람에 휘날리는 머릿결 사이를 통해 한가롭기까지 한 시선을 보내는 선영. 아름답지만 메마른 눈동자가 별 감정없이 그에게로 향했고 온힘을 쥐어짜서 외친 목소리에 대한 의무적 보상마냥 그녀의 조그마한 입도 열렸다.




“납득할 때 되지 않았나?”




“납득했어. 하지만… 하지만…….”




성진은 마치 엄청나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비척비척 일어섰다. 여전히 안간힘을 다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내 가슴은… 이런 젠장할! 내 직감.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납득할 수 없다고 호소하고 있어….”




“그게 뭔데?”




“살아야 해! 살아야 한다고…! 살아야…… 한다고…… 죽어야 하는 사람은 없다고…….”




논리도 조리도 없었다. 막무가내였다. 그러나 성진은 그 알 수 없는, 가슴으로 전해지는 그 무언가의 감각을 붙잡아 진실이라 믿으며 간절하게 반복했다. 몰라. 뭔진 몰라. 선영 네 말이 다 맞아.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네가 죽으면 나도 죽거나 미쳐버릴 거야!”




허공을 향해 부르짖듯 외치는 성진. 급작스런 감정의 기복으로 인해 무리하게 목소리를 내어 이젠 다 쉰듯한 소리만 내고 있었으나, 그의 처절함은 온몸으로 증명되고 있었다. 성진은 정말로 죽어버릴 것처럼 파르르 떨었고 얼굴은 벌개지다못해 점차 새하얗게 변해갔다.




그리고 선영은 한숨을 폭하고 쉬었다. 물론 죽음에 대한 무게감이 변한 건 아니었지만 성진의 저 꼴불견이다싶을 정도의 몸부림 때문에 찝찝해진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단조로운 시선으로 성진을 바라보던 그녀는, 난간에 다가갔던 걸음걸이마냥 다시 천천히 성진에게 몇걸음 걸어갔다.




두 다리가 풀려버린 듯 성진은 다시 반쯤 주저앉아있었다. 그래서 선영이 다가가자 성진은 고개를 들어서 그녀를 바라보아야 했다. 느지막한 오후 햇살이 정면으로 그의 얼굴을 비추어서 선영을 바라보는데 굉장한 눈부심을 선사했지만 성진은 힘겹게 눈을 떠서 기필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런 힘겨운 시간을 구원해주기라도 하듯 툭하고 열리는 선영의 입술.




“너 자신도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납득할 수 없다고 호소한다면, 그것을 납득시키는 방법 또한 존재하지 않겠군.”




“몰라… 죽지 마.” 




“논리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널 붙잡아두는 그 정체를 밝혀서 알려줄 순 없나?”




“몰라… 죽지 마.”




선영은 그만 실소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진은 죽지 말라는 말만 어린애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선영은 잠시 한 손을 허리에 얹은 채로 먼 곳을 응시하다가 미소 띤 얼굴 그대로 성진을 내려보며 물었다. 도저히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고 표현할 수 없는 평온한 미소로.




“날 사랑해준다 했니?”




간단하고 직설적인 물음에 성진의 정신이 번쩍하고 돌아왔다. 잠시 뭔가에 홀린 것처럼 눈물 범벅에 입을 반쯤 벌린 상태로 고개만 끄덕이는 성진. 그의 입은 ‘어, 어’하고 말하고 싶어하는 듯 보였지만 생각의 서두름이 앞서서인지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선영은 답을 들은 것처럼 역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걸음 물러섰다. 그리고는 성진을 시험해보듯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사랑이란 건 좋아하는 감정이 선행되어야 하지. 그럼 무엇이 나를 죽게 놔두지 못할 정도로 좋아진 거지, 김성진?”




“그건…….”




“단순히 죽게 놔두지 않기 위한 수단이었거나 동정심 같은 거라면 이대로 영원히 바이바이야. 그건 그저 나를 비참하게 만들 뿐이니까.”




성진은 그녀를 보내지 않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며 짧은 시간 안간힘을 다해 머리를 굴려보았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하지만 한번 제대로 사귀어보지도 못한 그녀에게 건넬 수 있는 가치있는 말이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얇은 사이란 건 인정해야 했다. 이럼 안 되는데… 그것도 그저 직감이라며 억지를 써야 하나? 그럴 수는…….




선영은 생각할 틈을 그리 오래 주기도 귀찮다는 듯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한쪽 발을 톡톡 옥상 바닥에 두들기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초조해진 성진이 다음으로 건넨 말은 참으로 엉뚱한 것이었다.




“너랑 섹스할 때 그것이 좋았어. 그러니까… 그 보지…….”




“……뭐?”




“아, 아니! 네 몸이… 네 미모가…… 아니, 그러니까… 그냥 그것이…….”




이번엔 다른 의미로 얼굴이 벌개진 성진이 당황하여 조금이라도 고상한(?)말로 표현해보려 했지만, 그러한 허둥거림은 반대로 더욱 상대에게 진실성을 심어주는 법. 따라서 선영은 팔짱을 풀지 않으면서도 어이가 없다는 듯 시선을 잠시 딴 데로 두며 헛웃음을 삼켰다.




성진은 결국 고개를 툭하고 떨구었다. 하지만 자신이 내뱉은 말을 회수할 생각은 없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대답이었지만 그것 외에는 다른 답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기에.




“모르겠어. 네가 왜 좋아졌는지… 하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야.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잖아? 외관으로 보이는 첫인상에 끌리는 것은 그저 얇은 기정과도 같지만 동시에 그 사람의 상당 부분을 대변한다고. 그것이 비록… 네 입장에선 연기했던 것이라 할지라도…….”




선영은 별로 친절한 여자는 아니었고, 그래서 성진의 필사적인 단어를 조합하는 힘겨운 과정 속에서도 ‘그래서?’라는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볼 뿐이었다. 성진은 이제 아예 용서를 구하는 사람처럼 옥상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려 애썼다. 마치 그의 말이 끝나면 그녀의 생명도 끝나는 것마냥.




“하지만 나는 네 연기하는 것까지 좋아했어. 뭐랄까… 너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라. 물론 현실에서 도망치려고 그랬기에 그랬겠지만…. 나는 어쩐지 그 열화와 같은 몸부림 속에서도 정형화된 네 내면의 여유로움. 보통 사람들에 비해 한없이 약하면서도 한편으론 한없이 강한. 그 너만의 특성에 나는 반해서…….”




“네 얘기를 하는 것 같군. 약하면서도 강한.”




성진은 무슨 소리냐는 듯 다시 어렵사리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햇빛은 그녀의 뒤쪽에서 비쳐와 얼굴을 어둡게 만들고있었고, 성진은 그녀가 긍정인지 부정인지조차도 판별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곧 선영은 그의 말이 더 이상 듣고 있기 지겨울 정도로 지지부진하단 걸 납득시켜주기라도 하듯 짜증섞인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뭐 좋아. 김성진. 너는 솔직한 남자야.”




“솔직한… 남자?”




“그거 하난 맘에 드는군.”




성진은 제대로 먹혀 들어간 건가 하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하지만 최대한 조바심나지 않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선영은 잠시라고 표현하기 애매한 사이를 둔 후 지나가는 목소리로 - 물론 성진에겐 ‘절대로’ 지나가는 목소리가 아니었지만 - 느릿하게 말했다. 건조하기까지 한 음성.




“여전히 난 이 세계를 살아가고 싶지 않아. 하지만 보류다.”




“보류…?”




“네가 자꾸 거치적거려서 말야. 맘 편히 나갈 수가 없겠군.”




지겨운 녀석이라는 시선을 쏘아붙이는 선영. 이와는 반대로 성진의 표정은 점차적으로 희망에 밝게 물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다시금 또다른 나락으로 추락하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대번에 바뀌었다. 물론 그것은 선영의 연이어진 애매한 결정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돌아가겠어. 언제 다시 끄집어내어져 보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영원히 못 볼 수도 있겠군. 어쨌거나 김성진. 네가 보고 있는 나는 조금 전까지 나를 대행하던 또다른 선영과 합쳐진 게 아니야. 내가 잠시 그녀를 누르고 올라와있는 것에 지나지 않지. 이제 그만 그녀를 풀어주고 나는 다시 가라앉을 거야.”




“뭐…? 선영, 선영아…… 왜 그런…….”




선영은 두 번 말하기 귀찮다는 투로 이번엔 경멸심을 담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친근함을 담아서 내 이름 부르지 말아줄래? 대행하던 녀석에게나 그렇게 말하든지. 호오, 그러고 보니 너.”




선영은 싱긋 웃으며 한쪽 다리를 들어서 꿇어앉아있는 성진을 걷어찼다. 퍼억-! 그녀의 구두를 안기라도 하듯 가슴폭을 움츠리며 뒤로 넘어지는 성진. 선영의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내 미모를 좋아했다고 했으니, 그 안에 누가 들어있든 별 상관은 없을 것 아냐? 뭐 있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건 없겠지만, 너한테는 위안이 되겠군.”




“서… 선영. 그게 아니…….”




성진은 허겁지겁 일어서려다 이번엔 앞으로 쓰러졌다. 자신이 적잖은 충격을 받았음을 몸이 자각한 것이다. 분명 깁스를 푼지 얼마 안 된지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어떻게 그 다리로 지탱하고 이런 힘을 낼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성진은 제대로 말도 낼 수 없는 아픔과 어안이벙벙한 정신 속에서도 엎어진 상태 그대로 그녀를 똑바로 올려보려 애썼다. 선영의 몸이 별안간 삐끗삐끗거리며 몸을 뒤틀며 불안정하게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것은…….




그리고 성진은 곧 이를 사려물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생존의 의지로 뛰쳐나왔던 ‘대행’인 또다른 선영이 다시금 그녀의 내면에서 솟아오르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성진은 다시 잠식하려는 ‘본래의 선영’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비단 그녀의 발길질에 넘어져서 몸을 가누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그녀만의 의지. 성진은 다시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쓰러질 듯 말 듯 서있는 선영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심하게 비틀린 다리로 지탱한 그녀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녀의 온 몸은 이제 파들파들 떨리었다. 그리고 그 순간, 위화감이 일 정도로 바람에 흩날리는 아름다운 그녀의 머릿결 사이로 본래의 선영이 간직한 특유의 깔보는 듯한 눈빛이 아래로 내뻗어졌다. 그 시선은 성진을 향하고 있었고, 성진 또한 심하게 일그러진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선영은 그 짧은 사이 히죽 하고 웃었다. 마치 작별인사마냥.




“그녀의 다친 다리에 대해 감사해야 할 거야. 그렇잖으면 넌 꽤나 극한의 통증을 느끼며 기절할정도로 걷어차여졌을지 모르니까.”




마지막의 이 말은 텔레파시라도 되는 양 메아리처럼 성진의 머릿속을 울려댔다. 인정사정없이 내리쬐는 저 빌어먹을 오후의 태양 때문이었을까. 성진은 그것이 정말로 텔레파시라고 해도 믿어야겠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뒤이어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도 들려왔던 듯하지만 어쨌거나. 주먹다짐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웬만큼 강한 성진에게 있어서도 그녀의 발길질은 꽤나 매웠건만, 그것 또한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놀라움이 일었다. 사실 그 의문과 놀라움을 정립할 시간 따위도 별로 없었다.




다음 순간, 성진은 원래의 ‘대행’ 역할로 돌아온 선영이 깁스를 푼 다리에 힘을 잃으며 무너지듯 주저앉는 것을 보고, 자신의 아픔을 뒤로 한 채 그녀에게 뛰어들 듯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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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의 경고는 늘상 그렇듯 똑같은 어둠이란 무기. 하지만 인간이란 피조물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기에 늘 그런 무기를 들이대는 것처럼 접어들어왔고, 그것은 성진의 원룸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순 없었다. 성진은 자신이 어느 쪽 손을 들어올리는지도 모르는 표정으로 형광등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딸깍. 인위적인 빛이란 방어수단으로 인해 어둠이란 무기는 잠시 물러갔다. 그리고 옆에 있던 선영은 진이 다 빠진 몸짓마냥 비틀비틀 침대로 다가가 쓰러지듯 자신의 몸을 던졌다.




성진은 문득 고개를 들어서 원룸 천장의 형광등을 바라보았다. 두 개 끼워져서 빛을 발해야 할 삼파장 형광등은 한쪽만 불이 들어와있었고, 다른 한쪽은 꺼져 있었다. 수명이 다 된건지 어떤 건진 모르겠지만 전등이 나갔군. 새로 갈아 끼워야 하지. 그래. 끼워야하는데…….




성진은 선영이 쓰러져있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사이드레일에 등을 기대고는 고개를 뒤로 꺾어 침대 시트에 정수리를 대었다. 앞으로 죽은 듯 쓰러져있는 선영은 성진이 침대에 기댄 걸 아는지 모르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성진은 그녀가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확인해보기도 귀찮았다. 전등이 하나뿐이라 어두워진 방 안에서, 선영과 성진은 둘 다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상태로 수십분의 시간을 한량없이 보냈다.




고요히 퍼지는 책상 위의 탁상시계 소리.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먼저 움직인 쪽은 성진이었다. 그는 젖혔던 고개를 별안간 앞으로 숙이며 사이드레일에서 등을 조금 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꺼진 전등을 갈거나 옷을 갈아입거나 할 평범한 일상을 수행하려고 선행한 동작이 아니었다. 성진은 눈을 똑바로 뜬 채 나뭇결을 흉내낸 원룸 바닥지를 노려보았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일그러진 얼굴로 잠시 바닥지를 보면서 생각에 잠긴 성진은 갑자기 눈물이 왈칵 흘러나올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도대체 뭐지? 왜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울컥함이 치솟아오르는 거지? 그렇다. 선영은 결국… 나오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하마터면 완전히 없어질 뻔했던 그녀의 자아와 파괴되길 원했던 육신. 성진 그 자신이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겨우 상황이 악화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으나, 사실 더 이상 악화될 것도 없는 듯했다. 성진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라곤 그녀는 두 번 다시 현세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뿐이었다.




돌아오지 않겠다고…. 그래. 그렇겠다고…. 이제 다시 본래의 선영은 볼 수 없는 건가?




볼 수 없어…?




볼 수 없다니… 볼 수 없다니….




…이런 젠장할……!




성진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쥐어 원룸 바닥을 부서져라 내리칠 뻔했고, 실낱같이 남아있던 이성이 간신히 그 행동을 제지했다. 성진은 현재 ‘대행’하고 있는 그녀가 침대에 쓰러져서 죽은 듯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지쳐있다는 점을 자각한 것이다. 소란을 피워봤자 좋은 건 없다. 손바닥에 붉게 손톱자국이 파일 정도로 주먹을 쥔 상태에서 바들거리며 경련하듯 팔을 떨고 있을 뿐. 성진은 뜨거운 그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치솟아오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소할 현실이 존재하지 않음에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다. 목이 메이고 타들어갈 것처럼. 여전히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




잠시 후 성진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현관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이미 밖은 꽤 어두워져있었고, 기이한 경험을 한 선영만큼은 아니지만 성진도 상당히 피로해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성진은 옷매무새를 여미며 신발을 도로 신었다.




“나갔다 올게.”




감정을 닫은 나지막하고 간단한 인사. 그리고 문 손잡이를 잡아 돌리는 성진. 대답할 기운도 없는지, 그의 짐작처럼 잠든 것인지, 아니면 알 수 없는 미안함에 사로잡힌 것인지, 진전 없는 결과에 말도 하기 싫은 건지. 어떤 답도 골라낼 수 없을 것만 같은 단조로운 자세로 엎어져있는 그녀는 성진의 인사조차도 완벽한 무의미라는 걸 증명해보이기라도 하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진도 그 사실에 별 감응 없이 그대로 현관문을 열어젖혀 바깥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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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인데도 별달리 쓸 말이 없네요;


그리고 연재 재개했다고도 애매합니다…. 정말로 바빠져버린지라;


3편정도 더 쓰긴 했는데, 연재에 대해선 너무 기대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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