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물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51부

본문

그것뿐만이 아냐.”




동혁의 이해할 수 없다는 심경을 거의 맞추었다고 생각하던 규한은 묻는 시선으로 선배를 바라보며 커피 빨대를 다시 빨아들였다. 커피컵에 담긴 카페라떼는 이제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규한이 천천히 커피를 목으로 넘기면서 그 향을 음미하는 사이, 동혁은 시선을 짐짓 딴 데로 두면서 입을 열었다.




“김성진 그 녀석, 최근엔 자기네 삼촌 가게 납품 일도 그만둔 것 같더라고.”




규한은 당연하게도 그 말과 현 화제의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동혁 또한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생각했는지 재차 말을 이어갔다.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성진이 혜진이랑 데이트하고 다니는 거 알고 있지?”




“물론이죠. 방학기간이라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성과 데이트하려면 뭐가 가장 필요하지?”




“일단 여자부터 필요하죠. 남자인 저의 입장에서는. 핫핫.”




“에라이.”




동혁은 농담할 기분 아니라며 테이블 한 켠에 놓인 티슈 쪼가리를 뭉쳐 규한에게 던졌다. 그리고는 엄지와 검지로 동그랗게 모아쥐어 보이고는 강조하듯 말했다.




“이거 아냐, 이거. 커피숍이나 영화관은 물론이고 패밀리 레스토랑, 비싼 쇼핑점 등등 수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데이트하다 보면 하루 몇만원에서 십몇만원 쓰는 건 순식간이다. 그런데 혜진과 사귀기 전에도 집세라든지 용돈벌이를 충당하려 주말 납품일을 하던 녀석이, 사귀고 나서 더 돈들어갈 일이 많아지는데 일을 그만둔 게 이상하지 않냐?”




“듣고 보니 그렇네요. 어디 복권에라도 당첨됐나?”




“더치페이도 한계가 있지, 보통 남자들은 여자들과 데이트하려면 상당한 비용을 감수해야 해. 그런데 납품 일도 그만둔 녀석이 예전보다 더 자금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건 두 가지로 압축해서 생각해볼 수밖에 없어. 네 말처럼 복권에 당첨됐거나, 아니면 든든한 자금줄이 하나 생겼거나.”




혜진의 집이 엄청난 재력가라 데이트 비용 대부분도 그녀가 충당하고 있으며(그것도 모자라 용돈(?)까지 주고 있으며), 그 대신 성진은 그녀와 함께할 시간을 더 늘리기 위해 납품 일을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이렇든저렇든 혜진이 학교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는 그냥 아주 예쁜 평범한 학생의 연기일 뿐이었으니. 물론 인맥 넓고 여자 경험 풍부한 동혁조차도 혜진은 ‘섹스에 능숙하지만 평상시엔 안 그런 척 내숭 떠는 스타일’ 정도밖에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동혁은 성진의 이해할 수 없는 넉넉한 자금력을 제 3자인 은선영에게서 추리해내기 시작했다.




“든든한 자금줄이라면…?”




“게임 대회 우승 상금이 꽤 짭짤하지?”




규한은 거의 다 마신 커피컵의 빨대에서 입을 뗀 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에? 설마… 선영이 그 비용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하는 거에요?”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냐? 난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데?”




동혁은 에스프레소를 쭉쭉 빨아들이면서 시선을 다시 테이블 위에 눕혀진 태블릿으로 내려놓았다. 그의 입에서 이전부터 쭉 생각해온 부분인 듯 건조한 음성이 막힘 없이 내뱉어진다.




“애초에 선영의 자살소동이 있던 후, 나를 포함한 몇몇만 알고 있는 그녀의 기억상실증. 그 중에서도 나는 좀 더 자세히 알고 있지. 지금은 상당부분 나아졌지만 초기엔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기억을 잃었었다. 그리고 성진이 그 기억을 되찾는데 도와준다곤 했지만, 여기서 그가 선영을 은근슬쩍 이용해먹었을 수도 있다는 거지. 병원비와 자신의 집에서 지내는 대가 등등으로 훨씬 많은 비용을, 기본적으로 뛰어난 그녀의 두뇌를 이용해 게임 대회 등에서 벌어오도록 하는 거지. 그리고 자신은 그 수입으로 혜진과 즐기고 있는 거고.”




그들의 이상한 관계를 한순간에 그럴 듯한 조합으로 짜맞춘 동혁의 말에 규한의 놀란 표정은 심각함으로 변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 감도는 정적. 카페 한켠에 들려오는 커피 주문 목소리와 주문을 받는 목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규한은 할 말을 잊은 채 동혁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동혁은 규한을 쓱 하고 바라보며 소리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냥 끼워 맞춰 본거야.”




“네…?”




“하나의 가설로만 생각해두라고. 김성진 그 녀석이 그렇게까지 나쁜 녀석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아니까.”




규한은 빈 카페라떼 컵의 빨대를 쪽쪽 빠는 척하면서 은근히 물어보았다.




“그럼 왜 그런…?”




“말 그대로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 입학 때부터 녀석과 두 학년을 같이 보내긴 했지만, 본디 사람이란 건 어디까지고 믿을 수 없는 존재니까.”




규한은 계속 빈 빨대를 빨며 속으로 성진이 동혁의 이미지에 대해 한마디로 표현했던 어구를 상기했다. 유명 기업의 지사에 어울릴 듯한 퉁퉁하면서도 믿음직한 사장. 하지만 실속성만큼이나 사람을 뼛속까지 믿을 수는 없는.




그렇긴 해도 그 편이 세상을 안전하게 살아가기 좋을 것이다…. 규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이런 인간관계가 대학생 이상의 성인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경계선이란 건가. 하지만 규한은 더 이상 깊이 생각에 빠져들지 못하고 동혁의 다음 말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이렇든저렇든 조금이라도 더 세상을 살아본 선배가 하는 말은 가치가 높다.




“나는 그보다는 더 가능성 높은 안 좋은 예감이 기분을 거슬리게 하는군.”




“더 가능성 높은 안 좋은 예감이라뇨…?”




동혁도 이제는 비어버린 에스프레소 컵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관찰하는 눈길을 주고 있었다. 물론 생각은 완전히 상관 없는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은선영 말이야. 난 그들의 자세한 상황을 모르고 또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해도, 어찌됐든 성진은 요새 혜진하고만 어울려다니고 있어. 선영은 거의 그의 손에서 떠난 상태라고 보면 돼. 그런데 앞서 말했듯 기억상실증과 함께 잃어버린 방어 기제는 이 험한 현실로부터 노출되어있단 말야. 20년 넘게 살아온 우리들은 물론 세상 다 살아보았다고 자부하는 듯한 할아버지들도 종종 사기와 감언이설에 넘어가는 현실인데, 이제 막 사회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는 녀석은 어떠겠어? 그렇게 혼자 유명세를 타며 다니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가 파 놓은 함정에 빠져들고, 이용당할 소지가 높다는 거지. 구체적인 형태가 어떨지는 몰라도.”




“설마… 아무리 주변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녀라곤 해도, 지켜줄 사람이 성진 선배 하나뿐 일라고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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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슈웅-! 콰쾅-! 퍼펑-!




- ‘실버레인’ 선수의 공세입니다. 엄청난 수입니다. 물량도 물량이지만 대체 그 유닛들을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적의 열세적 공간에 치고 들어가도록 하는지 불가사의할 정도입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카잔 전쟁’ 여신의 정갈한 플레이일까요. 상대자인 ‘드래곤 플라이’ 선수는 완전히 말렸다는 표정입니다 -




경기장 벽 중앙에 중개되는 대형 스크린과 울려 퍼지는 게임 사운드가 무색할 정도다. 경기의 결말을 달리는 듯한 절정의 함성소리, 환호소리, 박수소리가 뒤엉켜 일종의 축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어느새 조직화되어 응원 구호까지 외치는 팬들의 목소리는 아마추어 게임 대회라고는 짐작되지 않을 정도로 열띤 열기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중심이 되는 선영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여태까지 그래온 것처럼 뿌듯하다거나 기쁘다거나 혹은 팬들을 위한 일종의 표정 관리마저도 없다.




선영의 머릿속은, 정확히 말하자면 뇌에는 게임 하나에만 전념하기엔 기본적으로 활동성이 너무 높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쉴새없이 뇌에서 전달하는 명령에 따라 모니터속 유닛들을 운용하지만, 이미 그것과는 별개의 생각에 더 빠져있는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나마 경기 내용과 관련된 일련의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물론 이것 또한 현 경기와는 별 상관이 없다). 이전에 창오빠와 채팅창으로 대화했던 내용 중 하나를 곱씹어보는.




- 기자들이 집 앞을 왔다 갔어? -




- 응, 아무래도 자꾸 우승을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 같아. 그런데 정말 집 앞까지 찾아왔더라고. 기자란 게 원래 그렇게 무서운 직업인가봐? -




- 이상하군. 선영 네가 아무리 특별한 케이스라곤 해도, 또 기자란 게 아무리 그런 직업이라곤 해도 상대는 한낱 객원기자에 지나지 않아. 더군다나 경기가 방송에 회자되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야. 그런데 벌써 거주지까지 알려질 정도면… 네 신상정보가 인터넷 같은 곳에서 흘러나가고 있다는 뜻이 돼 -




- 뭐…? 그게 그렇게 심각한 일이야, 창오빠? -




- 신상 정보가 뿌려지는 것 자체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지. 게다가 세세한 신상정보가 아닌, 그저 거주지 정도만 파악됐을 경우는 아마 지나가는 사람의 제보일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내가 꺼림칙한 건… 그게 의도적일 경우 당사자가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거지. 네 행로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군 -




웬만해선 남의 우려를 귀담아듣지 않는 성격인 선영도 태환의 말이 단순한 기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물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이미 짐작하던 바이지만 그녀의 인기몰이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급상승하고 있었다. 성진의 원룸 근처엔 점차 그녀의 행보를 취재하려고 배회하는 기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대로는 자신의 위치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카잔 전쟁’ National Champiomship의 우승자 은선영 씨의 소감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 게임에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으며….”




늘상 그래왔던 것처럼 반복되는, 하지만 약간씩 멘트를 바꾸어가며 무난하고 평범한 소감을 조합해 내뱉는 선영. 그리고 그런 그녀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연단 앞에 놓인 수많은 관중들 사이에서 심적 동요가 일만한 인물을 하나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순간 그녀가 생각하던 신상 정보 노출에 관한 점과 그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스토커 기질이 있는 그라면…….




다행히도 여러 경기들을 거치며 같은 행동을 반복해온 그녀로서는 본능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소감을 마무리하는 연기를 완수했지만, 선영은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뜨기로 결심했다. 선영은 우승 상금을 입금받을 계좌번호를 기재하는 절차를 마치자마자 경기가 열린 거대한 체육관 로비로 뛰쳐나왔다. 그녀는 관중들 사이에서 자신을 의미심장한 미소로 응시하던 프로게이머 홍준석을 뇌리에서 빨리 떨쳐내고 싶었다. 마치 몸이 그 자리에서 떠나면 생각도 떠나갈 것처럼.




하지만 광적으로 집요한 기자들은 선영이 자리를 뜨는 데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고, 그녀는 뒷문으로 향하는 좁은 복도에서 그들과 얽히고설키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은선영 씨. 이번 대회도 손쉽게 우승을 차지하셨는데, 자신의 플레이는 완벽하다고 스스로도 인정하십니까?”




“젤리를 건네는 퍼포먼스는 이제 완전히 중단하신 건지요?”




“명색이 준프로게이머인데, 이정도 인기몰이라면 극성 팬들 중에서라도 서포트해주시는 분이 안 계시던가요?”




더웠다. 선영은 바깥 날씨와 이 좁은 복도에서의 기온 차이가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지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도를 꽉 메운 기자들과 자신을 추종한다는(정작 그녀 자신은 전혀 불필요했지만) 팬들이 선영의 모습을 오프라인으로 한번 뵙고 싶었다며 달려드는 통에 그녀는 한발한발 전진하기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가장 그녀의 심적 동요를 일게 하는 건 우승 소감을 발표할 때 눈이 마주쳤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남자의 웃음이었다. 홍준석…. 그가 왜 여기에서 그녀의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으며, 자신을 향해 보내던 미소의 의미는 무엇일까. 선영은 더운 입김을 뿜어대는 인파들 속에서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퍼억-! 타칵-!




그런 그녀가 복도 코너를 돌 때 한 남자와 부딪힌 것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현재의 그녀 입장에서는. 선영은 정신 없는 와중에도 자신이 부딪혔던 그 충격보다 알 수 없는 묵직한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더 기겁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비틀거리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는 선영의 시야에 들어온 건, 웅성거리는 주면 인파 사이에서 바닥에 떨어진 검은 네모 반듯한 물체를 주워드는 한 남자였다. 선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그 남자와 부딪쳐서, 그 남자의 손에 든 얇은 책 비슷한 검은 물체를 떨어뜨리게 했음을 자각했다.




그 물체는 선영이 보기에도 책 따위가 아닌 상당히 고가일 듯한 기계였다. 실제로 남자는 매우 곤혹스러워하며 그것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 이…… 이거…….”




“앗, 저…… 저어…… 죄… 죄송…….”




서로 각자의 입지에서 난감해진 상황. 선영은 뒤에 따라오는 기자들과 팬들 때문에 간단히 사과 인사만 남기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떨어뜨렸던 고가의 기계 같은 물체였다. 그것이 고장났다면 자신의 책임이 컸기에 나 몰라라 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선영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인파는 바로 뒤까지 따라와서 에워쌌고, 부딪혔던 남자는 그제서야 상황파악을 하는 듯 선영과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 그… 그거… 괜찮나요?”




“뭔가 복잡한 것 같네요.”




“네…?”




남자는 선영의 질문에 대답한 건지 아니면 다른 말을 한 건지 모르는 투로 중얼거리고는 선영의 팔목을 잡았다. 선영이 어리둥절해하는 것도 잠시, 남자는 살짝 웃으며 명랑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뛰죠.”




“예? 어… 엇……!”




남자는 한 손에 그 검은 물체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팔목을 잡은 채 복도의 출구 쪽으로 냅다 달려갔다. 덕분에 선영은 엉겁결에 끌려가다시피 같이 뛰게 되었다. ‘자… 잠깐만요’ 선영이 그렇게 소리지르지 못한 것은 어찌 됐든 모든 난감한 상황에서 가장 빠르고 명확하게 탈피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이미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인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복도를 달려댔고, 곧 둘은 차갑지만 상쾌하기까지 한 겨울바람이 부는 바깥으로 튕겨지듯 나오게 되었다.




휘잉-!




세찬 바람이 선영의 머리칼을 흩날리어 옆에 선 남자 쪽을 향하게 하고 있었다. 체육관 밖은 차가 몇 대 지나다니고는 있었지만 한산하기 그지없었고, 선영은 숨을 고르면서도 자신을 구해준(?) 남자를 돌아보았다.




“헉… 헉…. 저… 저기….”




“후우… 괜찮아요?”




“저요? 저… 저야, 괜찮…….”




뭔가 물어봐야 할 입장이 바뀐 기분이 들면서도 선영은 남자의 말에 대답했다. 물론 그 더듬거리는 대답은 다 이어지지도 못했다. 남자는 이미 자신들이 나왔던 출구를 돌아보며 다음 대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곧 그는 선영 앞을 빠르게 지나쳐서 앞서 걸어가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까 그 인파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할 겁니다. 일단 사람들 눈을 피하고 나서 천천히 다른 문제를 생각해 보죠.”




“어… 어디로? 저도 같이 가요?”




“조금만 더 걸어가면 번화가가 있고 커피숍도 있을 겁니다. 그곳이 좋을 것 같네요.”




선영은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고, 남자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걸음을 멈춰서 선영을 돌아보고 있었다.




“쫓기고 있던 것 아니었나요? 혹시 제가 잘못 판단해서 실례를 범한…?”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선영은 이젠 그가 가진 고급스러운 검은 물체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더 관심을 갖는 그의 친절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문득 뭔가 화끈거리는 게 그녀의 내면에서 올라와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게 뭐지? 얼굴이 화끈거려? 얼굴이 빨개지는 건가? 나 왜 이러지? 죄송스러워서 이러나? 선영은 얼른 남자에게서 고개를 돌린 후 숙였다. 늘어뜨린 머리칼로 얼굴을 감추기라도 하듯.




그런 선영을 몇 발치 너머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피식 웃고는 다시 그녀에게 되돌아 걸어왔다. 그리고는 자신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선영 앞에서 그 검은 물체를 양 손으로 들고 이리저리 매만지는 시늉을 해보인다.




“흐음, 이거… 켜지지 않네요.”




“네…? 켜지지 않는다고요? 그… 그럼 고장?”




“아마도요.”




선영은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왠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남자를 응시하던 선영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저… 죄송… 해요. 어떻게 변상을 해야 할지…….”




“그러니까 가까운 커피숍이라도 가서 앉아서 차분히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선영은 입을 다물고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여유 있는 친절한 미소를 싱긋 하고 짓고는 몸을 돌려 다시 앞서 걸어갔다. 선영은 그의 뒷모습과 혹시 쫓아오는 기자라도 있는지 자신의 뒤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느지막한 오후를 알리는 화창한 햇살은 둘의 그림자를 약간 길게, 조용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이었지만 나비라도 몇 마리 너울거리며 날아다닐 듯한 따스한 겨울 낮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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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이 정체 모를 남자가 누군지는 뭐 다들 짐작하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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