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물

민들레와 해바라기 - 4부

본문

음 날은 은영이 성원보다 먼저 강의실에 도착해 있었다.




"안녕."




은영은 성원이 강의실에 들어오자 손을 들어 흔들었다. 성원은 자신이 늘 앉던 창가에 앉으려다가 머뭇거렸다. 그곳에는 은영이 먼저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 내 자리야. 비켜줘"




"나는 이 자리가 마음에 들어."




"내가 첫 강의부터 지금까지 앉았던 곳이야. 양보 못해."




성원이 강하게 말하자 웬일인지 은영은 순순히 비켜나 앉았다. 성원은 은영을 슬쩍 바라보고 그 곳에 앉으려다 다시 멈칫했다. 은영은 자신의 옆자리에 새로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러자니 자신이 은영의 옆자리에 찾아가는 듯한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됐다. 너 마음대로 해. 나는 다른 곳에 앉을테니."




성원은 그리 말하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은영이 성원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냥 앉아. 뭐 어떠니?"




은영의 손은 작고 부드러우며 따뜻했다. 성원은 그녀의 손이 주는 온기에 잠시 움찔했지만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자리를 옮겼다. 꼭 그곳이 아니더라도 강의실의 창가에는 자리가 남아있었다. 성원은 그 중 아무데나 앉아 가방을 놓았다. 




"너 정말 삐딱하구나."




그런 그의 옆자리에 어느새 쫓아온 은영이 앉으며 말했다. 성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새로운 자리에 적응하려는 듯 커튼을 제치고 창문을 열었다.




"나 책을 안 가져왔는데 책 좀 같이 보면 안될까?"




"고전 문학의 이해"시간 이었다. 성원은 은영의 말을 듣더니 책을 꺼내서 자기 앞에 반듯하게 놓았다. 그리고는 펼쳐서 혼자 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건 그녀와 공유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치사하기까지."




은영은 성원의 행동을 보며 살며시 웃었다. 




"하지만 네가 책을 그렇게 두면 내가 더 바짝 붙을 수 밖에 없어."




그렇게 말하며 은영은 의자를 끌어 성원에게 더욱 다가갔다. 은영은 향수를 따로 뿌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은영이 가지는 특유의 향기가 성원의 코를 간지럽혔다. 




"뭐 하는 거야. 오지마." 성원이 놀라며 은영에게 말했다. 




"그러면 책을 우리 가운데에 놓는 게 어떠니? 내가 잘 볼 수 있게 말이야."




성원은 고개를 저었다. 




"책을 가져오지 않은 네 잘못 때문에 내가 불편해야 할 필요는 없어."




"그런걸 친구 사이의 의리라고 불러."




"그렇다면 여전히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야."




어제의 대화를 떠올리며 성원은 간단하게 대꾸했다. 은영은 못말리는 성원의 대답을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대신 손을 뻗어 성원의 책을 잡아 정확히 자신과 성원 사이에 놓고는 만족한 듯 웃었다.




"내가 다가가는 게 싫으면 이렇게 놓고 책을 봐."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는 거, 매우 나쁜 버릇이야."




"친구는 남이 아니야. 사람들은 이런 걸 친구 사이의 우정이라고 부르지."




여전히 따스한 봄 햇살에 은영의 미소가 밝게 빛났다. 그건 봄에 어울리는 미소였다. 꽃은 거리뿐만 아니라 은영의 어여쁜 얼굴에도 피어있었던 모양이다. 성원은 손을 뻗어 책을 다시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기려다가, 은영의 미소를 보고는 슬며시 손을 거두어 들였다. 어쩐지 저 미소를 보니 책 쯤이야 그녀의 뜻대로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괜히 머쓱해진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은 성원은 툴툴거리며 말했다. 




"정말 제멋대로구나."






수업은 지루했다. 성원은 무엇보다 이 수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윌리엄 포크너는 말했다.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지 가르친다."고. 그건 문학의 지향점을 나타내는 말 중 하나였고 성원은 무엇보다 그 말을 신봉했다. 실제로 자신은 많은 책을 읽으며 수 많은 삶을 만났고 그들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지를 배웠다. 어부 산티아고부터 죽음을 원하는 니나, 혁명과 기요와 첸 그리고 혼란스러운 싱클레어와 개츠비까지... 비록 책 속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있었고 마주치는 고난과 질곡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단지 책 속에서 끝나지 않고 성원의 마음과 다른 읽는 이들의 마음에 스며들어 새로운 가르침과 깨달음을 전달해주었다. 성원은 문학이 가지는 힘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수업은 뭔가. 문학을 접근하는 방식이 성원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문학을 설명하려 들었다. 이러한 문장이 쓰인 이유, 이 인물이 왜 그래야만 했었는지에 대한 분석. 이 때에는 이렇게, 이런 장면으로. 갈등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는 무엇이며 숨겨진 복선의 의미와 작가의 의도. 이런 분석은 절대, 성원이 원하는 방식의 수업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여느때와 다르지 않게, 눈을 감고 무엇을 생각하거나 창밖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너 또 수업 안 듣고 있는 거니?"




그때, 눈을 감고 있는 성원의 귀에 대고 은영이 속삭였다. 따뜻한 입김이 귀에 닿자 깜짝 놀란 성원은 은영을 바라보았다. 은영은 입술을 성원의 얼굴에 가까이 대고서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속삭이고 있었다. 




"넌 모든 수업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여."




성원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접근에 못마땅한 눈으로 은영을 바라보고는 대꾸해다. 




"네가 상관할 바 아냐."




그러나 은영은 여전히 입술을 그의 귀 가까이 붙인 채 말을 이었다. 




"짝꿍으로써 네가 수업을 듣지 않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어."




성원은 어쩐지 귀에 살짝 닿는 그녀의 숨이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은영의 얼굴을 손짓으로 조금 물리치고는 반박했다. 




"하지만 네가 나를 정말 짝꿍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짝꿍이 가장 원하는 것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나는 지금 이대로 나를 내버려두는 것을 원하는데."




은영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녀는 이제 성원과 조금 떨어져서 성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치만 너도 짝꿍으로서 나의 의견을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어. 나는 네가 수업 듣기를 원해." 




"미안하지만 나는 너를 짝꿍으로 인정한 적이 없거든."




"그렇게 말하는 건 반칙이야. 내가 뭐가 되니?"




은영이 서운한 목소리로 따졌다. 그러나 성원은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네게 내 짝꿍이 되어 달란 말한 적도 없고 네 짝꿍이 되겠다고 말한 적도 없어. 너 혼자 짝꿍놀이를 하는 것 뿐이잖아? 내가 거기에 장단 맞출 필요는 없어. 그러니 날 그만 내버려둬."




은영은 그렇게 말하는 성원의 옆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눈을 감아버린 성원은 아예 엎드려버렸다. 은영은 옆에 엎드린 삐딱한 녀석과 친해지기 정말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계속해서 툴툴대고 밉살스러운 말만 골라서 하는 게 여간 얄밉지 않았다. 은영은 그런 성원이 왠지 얄미워 자기도 모르게 뒤통수를 가볍게 쳤다. 




"어머!"




하지만 자신의 행동에 자신도 놀랐는지 제법 큰 외침이 은영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뭐야?"




동시에 성원에게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성원은 고개를 들고 구겨진 얼굴로 은영을 바라보았다. 은영은 당황했는지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고 커다랗게 토끼눈을 뜬 채 성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너, 내 뒤통수 친 거야?"




"어...어?"




성원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눈 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하다하다 별 걸 다하는군."




"아니. 나, 난. 그냥 별 뜻 없이..."




당황했는지 은영은 말을 조금 더듬기까지 했다. 




"거기 무슨 일 있습니까?"




그 때, 교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교수의 말에 은영과 성원의 고개가 돌아갔다. 은영은 교수를 바라보고는 자기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교수를 향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말했다. 성원도 그녀가 하는 모양을 지켜보고는 따라서 "죄송합니다." 하고 말했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것은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교수는 점잖게 이야기하며 다시 강의를 시작했다. 성원은 교수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돌려 은영을 한차례 노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 정말 여러가지로 대단해."




성원은 그렇게 말하며, 은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엎드려 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방금 한 행동을 스스로 납득하지 못했다. 평소,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한다고 자부하던 그녀였다. 그러나 순간적인 충동적으로 성원의 뒤통수를 때린 것이다. 은영은 어쩐지 억울하기도 하고 자신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돼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엎드린 성원의 뒤통수를 쏘아보고는 그를 따라서 그대로 엎드려버렸다. 






"미안해."




수업이 끝난 후 성원과 은영은 식당에 마주 앉았다. 은영은 성원 앞에 앉아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고 성원은 그런 그녀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수업이 일찍 끝난 탓에 식당은 한산했다. 




"어이가 없어서. 네 프로필에 항목 하나 추가해야겠다. 골탕먹이기 좋아하고 참견하기 좋아하고 모르는 사람을 귀찮게 하며 심지어 폭력적임. 세상에 안지 겨우 삼일 된 사람의 뒤통수를 때리다니 배짱이 좋다고 해야 하나?"




"정말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만... 그래서 점심 내가 쏘잖아. 이걸로 잊어주면 안될까?"




두 손을 모아 사과하던 은영이 애교스럽게 웃으며 성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성원은 어림없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콧방귀를 낄 뿐이었다. 




"내가 짐승이야? 때려놓고 먹을 걸로 구슬리게."




"그러지 말고... 자 밥 식겠다 어서 먹어. 응?"




은영은 그런 성원을 달래듯이 말하며 직접 숟가락을 들어 성원에게 건넸다. 성원은 안절부절 못하는 은영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무표정하게 숟가락을 받아 쥐었다.




사실 조금 전 수업에서의 일은 성원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동안 은영은 성원의 옆에 앉아 자주 재잘거리기는 했지만 매사에 침착했고 조심스러웠다. 마치 장님이 지팡이로 더듬으며 길을 찾듯 조심스럽게 행동 하나하나를 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충동적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때렸다. 성원은 은영의 숨겨진 면을 잠시 훔쳐본 듯한 기분이 들어 즐거워지기까지 했다.




"학교 밥은 싸고 맛있는 것 같아. 그지?" 




그런 성원의 마음을 아는지, 그가 숟가락을 받아 들자 자신의 사과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한 은영은 한결 편한 표정으로 두부를 간장에 찍으며 물었다.




"싸고 맛없어." 




성원도 더 이상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너 입이 고급이구나? 이 정도면 충분히 맛있다고 생각하는데?"




"네가 정말로 맛있는 밥을 먹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너는 그러면 이정도 가격에 이만큼 훌륭한 밥을 먹는단 말이니?"




은영은 토끼 눈을 하고 성원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들의 대화는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물론."




"나도 그런 데 있으면 소개시켜 주지 않을래? 학교 근처에 있는 식당이야?"




"아니." 성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너네집 근처에 있는거야?"




"아니."




"그럼 뭔데. 치사하게 너 혼자 먹으려고 안 알려주는 거니?"




은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성원을 흘겨보았다.




"우리집."




"뭐?"




"우리집 아침과 저녁이 이보다 훨씬 맛있어."




"아아. 너네 어머니 음식 솜씨가 좋은가 보구나."




"비슷해."




성원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은영은 자기 어머니의 손맛에 대해 한탄을 하면서 성원을 따라 부지런히 음식을 입에 넣었다. 






그 뒤로도 은영은 매 수업마다 성원의 옆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성원은 여전히 투덜댔지만 은영을 쫓아내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자신이 가라고 한다고 해서 갈 리가 없다는 것쯤은 충분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날도 성원과 은영은 나란히 앉아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은영은 강의실에 들어오자 마자 성원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책을 펼쳤다. 은영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고 흥분으로 들뜬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성원을 바라보며 노래하듯 말했다.




"난 이 수업이 제일 좋아. 어렸을 때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거든. 수업을 듣다보면 아, 내가 정말 꿈에 다가가고 있구나 실감이 돼서 기뻐."




"현대시론" 시간 이었다. 나른하게 몰려오는 졸음이 기분 좋게 성원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수업 시작할 때까지 시간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책상에 엎드렸다. 




"시를 좋아한다고 했지."




성원은 언제가 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햇살이 머리위로 떨어지는 게 기분이 좋았다. 




"너는 뭐가 되고 싶니?"




은영의 질문에 성원은 엎드린 채로 고개를 돌려 은영을 바라보았다. 아래서 올려다 본 은영의 얼굴은 색달랐지만 아름답다는 사실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는 듯 했다. 오히려 그녀의 오똑한 콧날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옆에 떠드는 사람이 없는 조용한 대학생."




"치, 그게 뭐니?"




은영이 투덜댔다. 성원은 은영의 삐죽 나온 입술을 힐끗 훔쳐보고는 말했다. 작은 조개같은 그녀의 입술은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그는 자신의 입술을 혓바닥으로 적시고는 대답했다. 




"나는 소설가가 되어야 해. 소설가가 되어서 꼭 써야 할 이야기가 있어."




성원은 "되고 싶어"가 아니라 "되어야 해"하고 말했다. 하지만 은영은 알아채지 못했는지 그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써야 할 이야기? 그게 뭔데?"




"넌 몰라도 돼."




"좋아하는 작가는?"




"헤르만 헤세."




"어쩐지 안 어울리는데."




성원과 은영의 대화 방식은 단순했다. 대부분 은영이 물었고 성원이 답하는 식이었다. 성원이 보기에 은영은 매일 밤마다 궁금한 것들을 잔뜩 만들어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항상 성원에 대해서 이것저것 캐물어왔다. 




"너는 좋아하는 시인 있어?"




그리고 아마도 처음이었다.




"우와!"




은영은 성원의 질문에 큰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뭐야? 놀랐잖아."




강의실에 일찍 와 자리를 잡고 있던 몇몇 학생들이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은영은 개의치 않고 흥분한 목소리로 성원에게 말했다. 




"처음이야!"




"나도 처음이군. 네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




"그게 아냐. 네가 나한테 드디어 질문을 했다구."




"그게 뭐?"




성원은 어이없는 눈으로 은영을 바라보았다.




"컴퓨터처럼 맨날 묻는 말에나 대답하던 바보가 내게 궁금한 게 생겼다 이거란 말이야. 대단한 발전이야."




"누구더러 바보래?" 성원이 발끈해서 말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구. 드디어 네가 나를 짝꿍으로 인정한 거구나."




"그런거 아니야." 




은영의 말에 성원이 부정했다. 하지만 그런 성원의 대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은영은 눈을 빛내며 성원에게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까지 했지? 아 그래 내가 좋아하는 시인! 정말 알고 싶어?"




"아니. 네가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니까 관심 없어졌어."




성은은 고개를 흔들었다.




"예이츠라고 알아? 아일랜드 시인인데 대단한 시인이야. 너도 한 번쯤은 그의 시를 읽어 봤을거야. 그는........"




그러나 은영은 들떠서는 자신이 아는 것을 있는대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 그의 애국심, 그가 어떻게 죽었으며 죽기전에 무엇을 했는지까지. 성원은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은영은 정말로 기쁜 표정으로 자신에게 예이츠라는 시인의 발가락 모양까지 설명할 기세였다. 




"못말리겠군."




성원은 열성적으로 말하는 그녀의 말을 대충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자장가 삼아 책상에 엎드렸다. 은영이라는 여자애는 이상했다. 침착한 듯 하면서도 가끔씩 충동적이었고 엉뚱했다. 그는 왠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눈을 감았다. 자신의 뒤통수를 때리고 본인이 놀라던 은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손을 머리 뒤로 돌려 보호하는 동작을 취했다. 




"치사해."




은영은 한참을 아일랜드 시인에 대해 설명을 하다가 엎드려서 뒤통수를 감추는 성원의 모습에 작게 툴툴대고는 입을 닫았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 중앙 광장에 놓인 벤치에 앉아 햇살을 쬐고 있는 성원에게 은영이 커피를 내밀었다. 




"커피 좋아하니?"




"별로."




그렇게 말하며 성원은 커피를 받아서 후루룩 마셔버렸다. 은영은 그를 보며 작게 웃으며 성원의 옆에 앉았다. 햇살에 달구어진 벤치는 적당히 좋은 온도를 가지고 그녀를 반겼다. 




"날씨 좋다."




은영은 봄의 햇살을 한껏 느끼려는 팔을 좌우로 벌리고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폈다. 그건 막 잠에서 깨어난 토끼 같은 모습이었다. 성원은 그런 은영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말을 했다. 




"봄이니까."




성원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은영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고 있었다. 




"봄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은영이 물었다.




"그저 따뜻한 걸 좋아하는 것 뿐이야." 




성원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럼 가을도 좋아하니?" 




"아니." 성원은 고개를 저었다.




"왜?"




"이유 같은 건 없어."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광장을 울렸다. 성원은 잠시 그쪽을 바라보았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서로를 윽박지르며 흥분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싫어하는 데에 이유가 없을 수는 없어. 네가 깨닫든 깨닫지 못했든 이유가 있을 거야."




은영도 성원이 바라보는 쪽을 슬쩍 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은영의 말에 성원은 빈정거렸다.




"나는 이유 없이 너를 싫어해. 그것과 같은 거야."




은영은 눈을 찌푸리고는 성원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밉게 하는 굉장한 재주가 있어. 대단해."




"칭찬 고마워."




성원은 가볍게 응수했다. 성원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공원을 둘러 보았다. 나른한 오후의 광장. 각자의 사연으로 바쁜 인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웃거나 화내거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성원은 문득, 그 봄의 공터에서, 자신이 가을을 싫어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생각을 했다. 순식간에 침묵이 들이닥쳤다. 가벼운 새처럼 날아온 침묵은 그들의 틈에 살며시 내려와 자잘한 깃털을 흩뿌렸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지."




싫은 기억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아마도 그 날이었을 것이다. 그녀와 이별하던 지독하게 하늘이 푸르던 그 가을날... 구름 한 점 없이 시리도록 푸르기만한, 그래서 더욱 서글퍼보이는 하늘 아래에서 그녀와 이별을 했던 바로 그 날. 꽃과 과실이 충만하게 영글어가는 계절의 한복판에서 그는 그녀와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그것은 누구의 의도도 아니었고, 절대 그들의 바라는 결과가 아니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맞이해야 했던 차가운 현실이었다.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자신을 비웃고 냉정하게 시간의 추를 돌리던 운명의 신의 장난이었던 것이다. 이별하던 그 때에, 그는 도저히 들어낼 수 없는 그 현실의 무게 앞에서 좌절하고 오열했다. 




"사실은 나도 가을을 싫어해."




은영의 말에 성원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띄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원은 그 미소를 보며 괜히 울적해졌다. 그리고 성원은, 점점 은영이 불편해졌다. 자꾸 은영을 바라보고 있으면 생각하기 싫은 한 여자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유가 궁금하지 않니?" 




성원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은영은 가볍게 물었다.




"별로."




"그럴 줄 알았어. 너는 호기심이란 건 없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그래도 알려줄게. 네 궁금증을 위해서가 아니야. 내 이유를 들으면 혹시 네 이유가 생각나지 않을까해서, 그래서 그 이유를 내가 알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에서야."




은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성원에게 말했다.




"가을은 식어가는 계절이야. 마치 그 계절은 자신의 따뜻함을 포기해버린 것처럼 보여. 나는 그래서 가을이 싫어. 차라리 아예 차가운 겨울이 나아. 어설픈 따뜻함이랄까, 초라한 냉정함이랄까. 가을이 가지는 미지근한 온도가 나는 싫은 거야."




은영의 대답에 성원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은영을 바라보았다. 언젠가의 대화가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도 그는 같은 말을 들었었다. "가을은 식어가는 계절이야." 






"나는 가을이 싫어."




"응?"




"가을은 죽음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이야. 나는 가을이 싫어."




"왜 그렇게 생각해? 누구도 가을에 죽음을 떠올리지 않아."




"하지만 가을은 식어가는 계절이야. 그리고 나도... 가을과 함께 식어버리겠지. 나는 가을이 싫어."






"너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어."




성원은 상념에서 깨어나 불쑥 그녀에게 말했다. 은영은 성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쩐지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충분히 익숙해지지 않았니?"




은영이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냐, 다른 문제야. 너는 내가 기억하기 싫은 사람을 떠올리게 만들어. 그래서 네가 불편해."




은영은 성원의 본심을 읽으려는 듯 표정을 살피다가 자애로운 눈빛으로 성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쁜 사람이었나 보구나?"




성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상냥했고 착했다. 




"반대야. 너무도 좋은 사람이었어. 이 세상 누구보다 더."




"그런데 왜 떠올리기 싫다는거야?"




"마음이 아프니까."




"그 사람이 알면 슬퍼 할거야."




"이제는 슬퍼할 수도 없는 걸."




성원은 그렇게 자르듯 말하며 벤치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은영은 그의 말에 무언가 대꾸를 하려다가, 힘이 없어 보이는 뒷모습에 입을 다물고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은영의 눈은 젖어 있었다. 슬픔에 젖은 듯 혹은 화가 난 듯한 눈빛으로 성원을 따르며 걷는 그녀의 뒤로 이제는 마냥 따스하지만은 않을 봄의 햇살이 부셔져 갔다.








*하하. 너무 둘만의 대화만 나와서 지루하시죠? 사실 쓰는 저도 그렇습니다. 남들처럼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적고 싶은데 글재주가 없다고 해야할지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해야할지. 아무튼 재밌게 읽어주시는 분들 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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