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물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64부

본문

성진은 사실상 이 비슷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분명 꺼림칙한 상황이긴 하지만 서로간에 이미 관계가 정리된 이상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반응을 하면 안 된다. 따라서 성진은 미선이 와도 그저 친한 후배처럼 가볍게 인사하며 받을 수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성진이 태연하지 못하고 놀란 건 미선의 반응이 너무도 평온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먼저 와서 아는 척을 하다니. 어쩌다 마주쳐도 어색한 상황임이 불 보듯 뻔한데.




대체 이 녀석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물론 순수하고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한치 앞도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여자 중 하나가 바로 미선이란 점을 성진도 알고는 있었지만.




“와, 이런 데서 다 보다니. 우연이네요, 선배! 반가워요.”




“어… 어, 그래. 반갑네.”




“여기 되게 비싼데, 선배도 꽤나 입맛이 고급인가 봐요.”




“내… 내가 먹고 싶다고 했어, 미선아. 오빠는 그냥 내 성화에 못 이겨서 온 거고.”




미선의 시선이 혜진에게로 돌아갔다. 혜진도 적잖게 당황하고 있었고 성진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으나 둘이 아는 사인가 하는 궁금증도 동시에 일었다. 그리고 미선은 다시금 살포시 웃더니 타박타박 혜진이 앉은 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 거야, 혜진아? 좀 너무한다. 성진 선배 자금이 넉넉지 못하단 걸 알면서.”




“아하하, 그… 그런가? 사실 좀 미안하긴 했어. 아하하하….”




“흐음, 하긴… 그래도 연인 좋다는 게 이런 거구나.”




성진은 혜진이 사는 거라고 반박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혜진의 미묘한 눈짓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보다는 미선이 왜 이 자리에서 사사로운 얘기로 시간을 끄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굳이 혜진과 자신의 사이를 강조하며 난처한 상황을 만들어가는 걸 즐기는 건가? 도대체 왜…….




어쨌거나 미선이 혜진과 친구 사이라면 혜진 역시 꽤나 불편한 상황일 것이다. 성진은 간신히 당황스러운 심경을 뒷전으로 하고, 여전히 혜진 옆에 서서 생글생글 웃는 미선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런데 미선은 여기 어떻게…?”




“아아, 저도 아는 선배가 식사를 산다고 해서 따라나왔죠. 제가 이래봬도 귀엽게 생겨서 선배들로부터 인기가 많거든요.”




미선은 그들의 얘기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먼 테이블에 떨어져 앉아있는 아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성진은 그녀와 동행인으로 보이는 아람을 흘끗 바라보고는 다시 미선을 쭉 훑어보았다. 확실히 그녀는 신경 써서 꾸미고 나와서인지 평소보다 더 발랄하고 예뻐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태도나 표정으로 봐서는 미선이 그 아람 선배인가 뭔가 하는 남자에게 별 관심이 없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연애 경험이 꽤 있는 성진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다시 아람 쪽을 바라본 성진은 그가 초조한 눈빛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일방적인 짝사랑이 되겠군. 어쨌거나 그건 그거고 성진은 미선에게 이제 그만 가보라고 윽박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따지고 보면 혜진과 사귀는 데 있어서 더 난처한 입장에 놓이기 전에 먼저 물러났던 건 미선 쪽 아닌가. 이제 와서 요구하는 것도 당당하지 못한 처지라 성진은 미선이 자꾸만 이상하게 집적대는 것을 대놓고 제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미선이 먼저 물러날 기미를 보였다. 그녀는 혜진의 뒤에서 걸어나와 성진 쪽을 지나치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보였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볼게요. 식사 맛있게 하시구, 우음…. 성진 선배. 납품 일도 그만두셔서 요즘 통 볼 수가 없어서 섭섭해요.”




“개학하면 또 자주 보게 되겠지.”




“아하하. 너무 멀었잖아요. 음… 아, 그리고….”




미선은 이제는 묶지 않고 어깨에 살짝 풀어내린 자신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면서 혜진을 바라보았다. 혜진은 움찔하며 미선과 눈을 마주쳤고 미선은 다시금 평온하게 생긋 웃어보였다. 그런 그녀를 바로 옆에서 올려다보던 성진은 어째서인지 그 미소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겨울이 역시 확실히 수월하네요.”




뭐가 겨울에 수월하단 건지 당연하게도 성진과 혜진 둘 다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미선을 다시 붙잡아서 물어볼 엄두 또한 내지 못했기에 둘 다 한동안 꿀먹은 벙어리처럼 멍하니 응시할 뿐이었다. 서로를. 그리고 미선이 돌아간 자리 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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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기식은 어디 갔어?”




쪽방에서 책상도 없이 바닥에 노트북을 내려놓고 선영에 관련된 정보수집과 이런저런 작업을 진행하던 형준. 그는 닫혀있던 방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렇게 물어보는 여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노트북을 들여다보느라 뻐근해진 목의 통증이 덮쳐왔지만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걸로 넘겨버렸다. 형준은 재차 노트북 화면을 내려다보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계획에 관련한 탐색’을 진행하러 나갔다.”




“그래?”




형준이 말하는 ‘계획’과 ‘탐색’이 무엇인지는 경희도 알고 있었기에 별말 없이 그녀도 몸을 돌렸다. 문득 그녀는 쪽방 한 구석의 벽에 기다란 벽거울이 걸려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경희는 잠시 그 앞에 서서 자신을 비춰보며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문득 경희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형준은 재빨리 노트북으로 고개를 다시 숙였다. 두꺼운 사각 안경 때문에 그의 눈동자를 제대로 볼 순 없었지만 경희는 그가 잠깐동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거울을 통해 뒤쪽으로 그의 시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뭐야?”




“…뭐가.”




고개를 들지 않고 반문하는 형준. 경희는 그런 형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터벅터벅 걸어가서 노트북 앞에 섰다. 기식의 예산으로 사정없이 틀어놓는 보일러 때문에 경희는 그의 아지트에 머물 때마다 늘 옷을 반쯤 벗은 채로 활개치며 다니곤 했다. 지금도 단추가 풀어져서 브래지어가 안쪽으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와이셔츠에 팬티 한장만 달린 걸친 상태였다. 형준은 경희의 맨발을 보고는 자기 앞에 그녀가 서있다는 것을 자각하곤 더욱더 고개를 푹 숙였다.




경희는 한 손을 허리에 걸친 채로 고개를 삐딱하게 옆으로 꺾어 그런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툭하고 입을 열었다.




“방금 나 봤잖아.”




“사람을 보는 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




경희는 무릎을 굽혀 그의 앞에 쪼그려앉아 시선 높이를 맞추었다. 형준은 의아한 얼굴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 새 경희는 왠지 재미있다는 미소를 띤 채로 그를 가만히 마주보고 있었다.




기식이 계획을 진행하는 동안 심심풀이용(?)으로 갖고 놀거나 성욕을 푸는 도구(적어도 아지트 패거리들이 보기에는)와도 같은 경희였지만 사실 그녀는 상당히 빼어난 미모였다. 그런 그녀가 바로 앞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본다면 여타 어떤 남성들이라도 얼굴을 붉히고 어쩔 줄을 몰라할 것이었다. 더욱이 여자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할 것 같은 못생기고 자신감 없는 주근깨 가득한 형준과도 같은 남자라면.




하지만 형준은 의외로 담담하게, 아니 오히려 뻐근한 목의 통증이 다시 느껴지기라도 하듯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경희 또한 그런 그의 표정에 별 신경도 쓰지 않고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오옷, 오. 사랑은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물질의 작용일 뿐’으로 정의할만한 공대생님께서 할말은 아닌 것 같은데?”




“용건이 뭐야?”




“할래?”




형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경희는 미소 띤 표정 그대로 와이셔츠 밑자락을 잡아 위로 슬쩍 들어올렸다. 무릎을 굽혀 앉은 그녀의 다리 사이로 끈팬티가 아닌가 싶을 만큼 조그맣고 얇은 팬티가 시야에 들어왔다. 새하얀 다리 사이에 위치한 여자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간신히 가리고 있는 예쁜 무늬의 팬티를 보는 순간, 형준은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경희는 의미심장하게 키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옷자락을 잡지 않은 다른 쪽 팔을 무릎 위에 올려놓아 입을 반쯤 가린 상태로.




“어차피 기식은 탐색이 끝나면 저녁 시간쯤에야 올 텐데. 다른 패거리들도 아무도 없고 오늘 올 것 같지도 않아. 온다고 해도 아주 늦은 시간이겠지. 어때? 여기서 할까, 아니면 거실에 소파가 있는데 거기서 할까?”




키보드에 얹혀놓은 형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경희는 재미있다는 듯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형준은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다.




“갑자기 왜 그런 제안을 하는 거지?”




“여자가 하자고 하는데 이유가 중요해? 그냥 하면 되는 거지.”




형준은 입을 꾹 다문 채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딴에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보이겠지만 사실 그런 건 아니었다. 그리고 경희도 그 시선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입술을 조금 옆으로 비죽이 내밀면서 툭하고 말했다.




“아아, 그냥 좀 너무한다 싶어서 그렇지 뭐. 네 입장에서는 내가 맨날 기식하고만 뒹구니까 ‘기분이 매우 그럴 것’ 아냐.”




‘참 친절도 하십니다’라고 비꼬지는 않았다. 형준은 다시 원래 자세 - 노트북을 내려다보는 고개 숙인 - 로 돌아가면서 짧게 대답했다.




“계획이 먼저다. 다른 건 그 후에.”




경희는 뚱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대단하시군.”




뭐가 대단하단 건지는 둘 다 묻지도, 더 이어가지도 않았다. 경희는 굽혔던 무릎을 펴며 다시 일어선 후 가볍게 몸을 돌렸다. 흰 와이셔츠가 상체를 대부분 가리고 있었지만 그런 그녀의 뒷모습도 아찔한 각선미가 연출될 것 같다. 형준은 그만 참지 못하고 다시금 몰래 고개를 들어 경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길게 뻗어진 그녀의 맨다리는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감으로써 곧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다시 혼자 남겨진 형준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그 계획은 중요해. 그러니 어쩔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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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식은 한 손을 주머니에 꽂고 다른 한 손으로 핸드폰을 쥔 채 만지작거리며 길가에 서있었다. 그의 귀에는 스마트폰에서 뻗어져나온 이어폰이 꽂혀있었고 입고 있는 갈색 코트자락이 바람에 가볍게 살랑였다. 겨울날씨답지 않게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 한복판에서 그의 모습은 매우 슬림하고 잘생긴 남성모델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그가 고개짓을 하며 앞머리칼을 옆으로 쓸어넘길 때마다 지나가는 여성들은 괜스레 그런 그의 모습을 흘끗거리곤 하였다.




대체 누굴 기다리는 걸까?




여느 여성들이 그런 궁금증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식은 그 ‘상대’가 나타나는 시간이 지연되자 근처에 놓여있는 벤치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몸을 돌려 거리 한쪽을 바라보았다. 낯익은 인영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흠….’




예상대로 선영은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약 10분 정도 늦긴 했지만 기식은 눈앞의 그녀가 너무도 예상했던 그대로 나와서 미소까지 지어질 정도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색하게 우물쭈물하는 태도에, ‘카잔 전쟁’ 대회 때와는 달리 중요한 미팅을 염두에 둔 깔끔한 옷차림. 특히 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은 먼 기억 속에 있던 차가운 본래의 선영이 아니라 기억상실증에 걸린 현재의 선영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가 가까이 왔을 땐 기식의 예상을 벗어나는 점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식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 겨울이긴 하지만 그다지 세지 않은 바람에 살랑이는 머리칼과 따라 흔들리는 재킷 속에 입은 기다란 원피스. 옆으로 맨 어깨의 가방과 작지만 예쁜 보석 귀걸이까지 차고 있는 그녀는 수많은 여자를 만나본 기식의 입장에서도 단연 설레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사무적인 만남 자리를 생각해서 화려한 차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녀의 뛰어난 외모는 약간의 수수함과 더불어서 더욱 순수하고 아름다운 미를 발산하고 있었다.




기식이 잠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쳐다보자 선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아, 죄… 죄송해요. 좀 많이 늦었죠?”




“아뇨, 그게….”




“차… 차림새도 칠칠치 못하게… 역시 단정하게 입고 와야 하는데… 너무 고민만 하다 보니… 죄송, 죄송합니다!”




어떤 고민인지 기식은 묻지 않았다. 너무도 뻔한 스토리인데다가 정작 상대는 너무 당황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를 테니까. 그리고 기식은 이렇게 숙맥의 일색인 여자를 상대하는 것에도 익숙했다. 그는 곧 자신 먼저 침착성을 되찾고는 귀에 꽂힌 이어폰을 빼며 빙긋 웃었다.




“아뇨. 잘 어울려요. 너무 튀지도 않고…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예… 엣? 아, 가… 감사합니다!”




선영은 단숨에 얼굴을 붉히고는 연신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리고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해 몸을 살짝 돌리고는 어쩔 줄 몰라했다. 기식은 그런 선영이 진정하길 기다리며 이어폰 줄을 정리해서 주머니 속에 꽂아 넣는 시늉을 했다. 이윽고 선영은 두 손을 뒤로 돌린 채로 기식 주변을 흘끗흘끗 둘러보았다. 그녀가 위화감을 느끼고 질문하길 기다리는 기식. 속으로 몇 번을 세면 질문이 튀어나올까 가늠해보던 그는 약 다섯 번을 가정했고, 정확히 속으로 느릿하게 다섯 번이 다다른 순간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저어… 그런데 오기로 한 다른 분들은…?”




기식은 손을 약간 양 옆으로 벌린 채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어찌된 일인지 다들 바쁜 일이 있다면서 못 온다네요.”




“예에?”




“이왕 이렇게 된 것, 영화라도 한 편 보러 갈래요?”




기식은 저 멀리 높다랗게 솟아있는 영화 상영관을 가리켰고 선영은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기식의 얼굴과 건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기식은 여전히 한결 같은 미소로 선영을 마주보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원체부터 이런 속셈이었다는 것을 들키든 말든 별 관계는 없다. 어차피 선영은 그가 만들어낸 자상하고 친절한 멋진 남자란 이미지 속에 푹 빠져 있었고, 접점의 구실은 작위적인 거라도 거부하진 못할 것이었다.




오히려 선영의 입장에서는 이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었으니 더욱 설렐 것이다. 선영이 얼굴을 붉히곤 안절부절 못해하자 기식은 슬쩍 그녀를 돕기라도 하듯 넌지시 물어보았다.




“왜, 싫어요?”




“아… 아뇨. 좋아… 아, 아니. 싫지 않아요.”




“그럼 얼른 가도록 하죠. 예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선영은 그가 영화 예매 시간에 맞추어 약속 시간을 잡았음을 짐작했지만 사실 그건 이제와선 아무 의미 없었다. 선영은 그와의 꿈 같은 데이트의 길로 접어든다는 기분에 마음 가눌 곳을 찾지 못하고 온통 설레고 있었다. 두 볼을 화끈 붉히면서 자신의 옆에 걷는 선영을 바라보며 기식은 다른 의미로 미소지었다.




기식의 입장에서야 매우 당연하게도 어떤 기억상실증인지 탐색하는 입장이었기에 선영과 단둘이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손이라도 한번 잡아줄까 생각하던 그는 천천히 해도 별 무리없을 거란 판단에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로 걸어갔다. 상영관을 향해 놓여진 고급스런 대리석 길이 겨울 햇살에 촘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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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 평일인데도 사람 정말 많네요!”




“요 근래에 흥미로운 대작들이 많이 출시되었거든요. 뭐 그리고 요즘이야 연인끼리 있으면 제일 만만한 게 뭐겠습니까. 이런 데서 영화라도 한편 보는 게 할 일이죠.”




“헤에…….”




늘 학교와 집만 고정적으로 돌아다니던 선영에게 있어선 활기가 넘치는 풍경과 사람들을 둘러보며 매료되기에 충분했다. 물론 예전 첫 ‘카잔 전쟁’ 대회 우승 때에도 다른 영화관에 가보긴 했었으나 규모가 작았고, 혼자서 억지로 이탈의 기분을 즐기려 했던 것이었기에 순수하게 와닿는 게 없었다. 더군다나 주변에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풍기는 수많은 연인들을 보면서 자신도 옆에 멋진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묘한 소속감을 가져다주었다. 선영은 왠지 편안해지는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기식의 팔을 슬쩍 붙잡았다. 그러다가 문득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었다.




“앗, 저… 죄… 죄송…!”




“뭐 볼래요?”




기식은 선영의 손이 닿았다는 사실도 모른 것처럼 태연하게 영화 포스터 용지를 몇 개 골라서 뽑아 건네었다. 선영은 멍청하게 그 용지들을 받아쥐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물론 평소에 영화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녀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보는 게 좋을지 감을 잡지 못하기 마련이다. 선영이 우물쭈물거리자 기식은 속으로 미소지으며(물론 겉으로도 다른 의미긴 하지만 역시 미소지으며) 그녀가 쥐고 있는 용지들 중 하나를 자신의 손으로 슬쩍 뽑아올렸다.




“이거 어때요?”




“열쇠 없는 집…?”




선영의 눈이 거무침침한 집이 그려져 있는 포스터 그림에 고정되었다. 기식은 집중해서 바라보는 선영에게 물어보았다.




“공포물 싫어하세요? 뭐 이 작품 같은 경우엔 스릴러쪽에 가깝겠지만….”




“아… 뇨. 흥미로울 것 같네요. 왠지 색다른 매력이 있을 것 같아요.”




“예, 그럼 이걸로 예매하도록 하죠. 아, 저쪽에 스넥코너도 있는데 팝콘이라도 먹으면서…?”




살쪄서 싫어하려나? 라고 짐작해보던 기식은 중요하지는 않지만 몇몇 곳에서 자신의 예상이 조금씩 빗나가고 있음을 경험했다. 선영은 전혀 그런 것 신경 쓰지 않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예! 역시 영화는 팝콘이 제맛이죠! 콜라도 곁들여서!”




“…에이드도 있습니다만.”




뭐 아무리 먹어도 살 안 찌는 체질도 있기 마련이지. 그런 여자들은 정말 축복받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던 기식은 고개를 살짝 젓고는 한가지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선영이 ‘열쇠 없는 집’이란 영화를 보기로 결정한 것은 탐색의 입장에선 매우 원하던 방향이다.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선 최대한 자극적인 걸로 실험하는 편이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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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열쇠 없는 집’이란 제목은 제가 생각해낸 건데 검색해보니 실제로 있더군요.(영화는 아니지만) 뭐 그래도 다른 제목 또 생각하기 귀찮으니 그냥 이걸로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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