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노리로리 - 7부

본문

7. 내게로 와






(딩동댕~)




“뒤에서부터 시험지 걷어와라.”




…….


아~아. 끝났다. 결국 이번에도 그냥 그렇게 시험을 쳐 버렸군.


한 며칠 책 잡은 건 좋았는데, 읽어도 도대체 이해가 안 되니…


평소에 수업을 들어야 되는 거였나. 뭐, 당연하지.




그래도 시험 볼 때는 잘 보려고 노력했다.


무엇 때문에…? 이안 오빠한테 잘 보이려고?


…뭐야, 우습군.




어쨌거나 덕분에 알지도 못하는 문제들 붙잡고 씨름하느라 머리만 아팠다.


애고 피곤해. 이게 왠 삽질이람…




……


교실을 나오면서 휴지통에 컴퓨터용 사인펜을 던져 넣었다. 골인~.


일단 내년까지는 네 녀석 볼 일이 없겠지. 


가능하면 영원히 보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노라~!”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독특한 이름으로 나를 부른다.


우리 반 애들은 이런 식으로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고개를 돌리니, 한 뼘 가까이 높은 위치에서 나타나는 낯익은 얼굴.




“음, 은진이구나.”


“오랜만이야~ 너 요새 왜 연락도 안 하구 그래…”


“…으응, 조금 혼자 있고 싶어서.”




그녀, 홍은진은 내가 가끔 어울리던 그룹의 리더격인 애다.


모델처럼 큰 키에, 어려서부터 합기도랑 태권도를 해서 굉장히 무섭다고 한다.


그 무용(?)으로 인해, 다른 학교에까지 꽤나 유명한 존재라고 한다.




대인관계가 거의 없는 내 귀에까지 소문이 들릴 정도면 말 다 했지만, 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나는 그녀와 꽤 가깝기 때문이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모임에 가면서 그녀를 자주 만났지만, 그다지 무서운 애는 아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냐. 괜찮아.”


“모임두 안 나오구, 걱정했어.”




‘모임’.


그녀의 그룹 소속인 다른 학교 남학생들을 포함해서 카페나 바를 빌려 한바탕 노는 행사다.


남학생들도 그녀 앞에서는 위축되는 느낌이었지.


…정말 소문처럼 그녀가 남녀 구분 없이 두들겨 패고 다닐까…?




“노라, 오늘 간단하게 놀다 갈 건데 같이 가지 않을래?”


“응…?”


“뭐, 많이는 아니고 진희랑 정미랑 너댓명이서… 아, 온다.”




아는 얼굴들이 3층 복도로 내려온다. 


아, 저뇬들. 갑자기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잊고 있던 악몽이 되살아난다.




“은진아, 나 그냥 갈게. 재미있게 놀아.”


“어…? 야아…”


“나중에 봐…”


“야, 노라~!!”




나는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 나왔다.




……


교문을 나설 때까지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얼굴에 손을 대어 보니, 아직도 화끈화끈 뜨겁다.


딱히 이제 와서 걔들한테 화를 내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같이 있기엔 그들과 함께한 기억이 너무나 불쾌해서,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는 없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은진이다. 우리 오랜만에 만난 거였는데…




“헉… 노, 노라, 너 무슨 걸음이 그렇게 빨라?”


“어…? 은진아…”




놀러 간다던 은진이가 뒤에 서 있다. 


허리를 구부리고 무릎을 감싸 쥔 채 헉헉대는 그녀.




“무슨 일 있는 거야? 시험도 끝났는데 그냥 가구…”


“……피곤해서. 너 놀러간다며…?”


“나, 나도 사실 좀 졸려서. 공부도 안 했는데 왜 피곤한지 몰라… 하,하핫.” 


“딴 애들은 어쩌고.”


“멀라, 그뇬들 지들끼리 알아서 놀겠지 모.”


“후훗.”




머쓱하게 웃던 그녀가 자연스레 내 어깨에 팔을 올린다.


키가 큰 그녀인지라, 자연스럽게 안기게 된다.


마치 이안 오빠 같은 남자처럼… 아, 그와는 이런 적이 없지. 힝.




“오랜만이네. 같이 가는 거.”


“응.”




그녀와 나는 같은 방향으로 집에 간다.


학교에서 우리 집에 가는 방향으로, 걸어서 한 15분만 더 가면 그녀의 집이 나온다.


작년 7월이던가. 내가 그녀와 처음 마주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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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이러면 곤란한데. 너 원래 이런 애 아니잖니.)




웃겨. 원래 내가 어떤 앤지 알고나 그러시나요 선생님.


아시는 거라곤 엄마 아빠 직업이랑 배치고사 점수뿐이잖아요.




(너 성적 계속 이러면 부모님을 오시라고 할 거다.)




집에서도 얼굴 보기 힘든 분들께서 학교엔 오실까 모르겠네요.


하하… 하하하하…




……


학교를 나와서 얼마만큼이나 걸었을까.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걷는 동안 집을 지나친 모양이다.


확실히 지금은 여름, 해가 길어졌는데도 어둑어둑해진 걸 보면 꽤나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낯선 골목. 노을과 함께 내 그림자가 깔리고 있었다.




돌아서야지.


멈추어 서서 한숨을 한 번 내쉰 다음 고개를 드니, 낯이 익은 소녀가 앞에 서 있다.




“이노리…?”


“…아…”




이 키 큰 애는 분명히 우리 반. 


이름이 뭐더라.


한 학기가 거의 끝난 지금도, 난 우리 반 애들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한다. 아니 외우지 않고 있다.


머뭇거리는 내가 안쓰러운지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그녀.




“은진이야. 홍은진. 이름 정도는 외워주라.”


“아… 미안.”




이름은 몰라도 그녀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의 큰 키와 어른스럽게 생긴 외모는 눈에 잘 띄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눈에 익은 것은, 자주 가는 학교 옥상에서 담배 피는 그녀를 볼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제나, 뭔가 따분하다는 듯이 하늘을 보며 담배를 물고 있었다.




“뭐냐, 세상 끝난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


“집에 가냐?”


“으응, 그게 좀…”




바보같이 지나쳤다고 말하기는 좀 민망하다. 


어차피 내가 어디 사는지 모를 테니, 적당히 둘러대자.




“…놀러 가지 않을래?”


“어…응? 뭐라고?”


“집에 가는 건 아닌 것 같고… 어디 딴 데 가는 게 아님 나랑 놀러 가자고.”




내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말을 자르는 그녀.


놀러 가자고?




“놀러...가자고…?”


“나도 지금 막 나가는 참이었어. 어때?”




학교에서 오자마자 사복 갈아입고 막 집에서 나온 모양이다.


하얀 진바지에 나시티를 입은 그녀의 자태는 같은 여자인 내가 봐도 멋있었다. 


아, 다리 진짜 길다아…


...근데 얘가 갑자기 내게 왜 이렇게 접근해 올까.




“어, 어디…?”


“따라오면 알아. 좋은 데야.”


“좋은 데라니… 근데 나 교복차림인데…?”


“흠… 여기 잠깐만 있어 봐.”


“어, 야, 저, 저기…!!!”




내가 뭐라고 할 새도 없었다.


그녀는 내게 자기 백을 턱 맡기더니 집으로 뛰어들어간다.


……


…이런, 그녀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렸다.


어쩌자고 난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 못했을까?


그녀의 가방을 가지고 있으니 그냥 돌아갈 수도 없다.


얜 뭘 믿고 나한테 자기 백을 맡겼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숨을 몰아 쉬며 뛰어나온다.




“헉…헉… 미안. 기다렸지.”


“아니… 뭐…”




그렇게 헐떡거리면서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데.


그녀는 쇼핑백에서 옷가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자아, 이거면 되겠지.”


“에… 이거 네 옷 맞아?”




그녀가 꺼낸 티셔츠와 짧은 청바지는 그녀가 입기엔 굉장히 작아 보였다.


으악, 저 바지 밑단 찢어진 거 봐…




“어, 이건 쫄티구… 바지는 작년까지 입던 건데 지금은 안 맞아. 너한텐 잘 맞을 걸.”


“헤에…”


“그럼 가자. 늦었네.”




……


그녀가 나를 잡아 끌다시피 데려간 곳은 그다지 멀지 않은 어느 지하 카페였다.


굉음에 가까운 락 음악이 제법 넓은 실내를 뒤덮고, 자욱한 담배 연기가 감돌고 있었다.


제각각 퍼져 있는, 내 또래로 보이는 스무 명 정도의 남녀들.




“어? 너 못 보던 앤데? 얘 누구야? 귀엽네.”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근육질의 키 큰 남자애와 마주쳤다.


그의 말에 갑자기 시선이 내게 모인다.


으아… 이 바지 볼수록 신경쓰인다… 허벅지가 보이려구 해…


다리도 긴 은진이 이걸 입으면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갈까…




“어디어디?”


“어… 쟤는…”


“야야, 비켜봐 좀… 내가 소개할게.”




딴 쪽에 가 있던 은진이 모여든 애들을 헤치며 내게로 온다.




“얜 이노리, 나랑 같은 반이고, 오늘부터 우리 그룹이다.”


“어…? 저기…”


“모두 환영하는 의미에서, 박수…!!”




(휘이익~ 짝짝짝…)




나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상한 그룹에 가입이 되어 버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자아, 신고식 해야지.”


“신고…식…?”


“이거 받아.”




은진이 버드와이저 한 병을 내게 안긴다. 




“이거… 마시라고?”


“어, 한 번에. 원샷이다.”




원샷이라니…


나 술 마셔본 적 없는데…


뒤에서 어떤 남자애가 소리를 지른다.




“야, 신입은 폭탄이잖아…!!”


“그래, 그 쬐그만 병 원샷이 무슨 신고식이야…”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온다.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는 락 음악과 함께, 실내가 고함에 가까운 말들로 시끄러워지고 있다.




“아이 썅 시끄럽네…!!”


“…….”




은진이 돌연 하이 옥타브로 고함을 한 번 지르자, 좌중이 조용해진다.


내겐 그녀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남녀 모두 그녀를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 그룹의 리더인 걸까.


그녀가 몸을 돌려 내게로 향한다.




“자, 노리. 마셔. 주~욱.”


“어… 어어.”




난 아까부터 그녀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린 상태다.


지금도 뭔가 주변의 압력을 막아주는 느낌도 들고, 그녀의 말을 듣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전 처음 마셔보는 술이 내 목구멍을 넘어가고 있다.




(꿀꺽꿀꺽)




“와, 쟤 두 손으로 든 것 좀 봐. ㅋㅋ”


“오오… 그래도 잘 먹는데…”




왜 이리 많아. 숨이 막혀 올 정도였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난 끝까지 병을 놓지 않았다.




“…푸아~.”




(와~ 휘이익~ 짝짝짝….)




“하하, 수고했다. 잘 먹는데…?”




은진이 활짝 웃으면서 내 어깨를 두드린다.


아 배불러.


근데, 갑자기 눈 앞의 바닥이 좀 흔들린다…




“야, 이노리…?!!”




……


아… 정신을 잃었었나 보다.


머리가 뭔가 포근한 느낌이다.


흐릿하지만 조금씩 시야가 밝아지면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나 보다. 천하의 홍은진이.”


“아~아. 신경 끄셔. 준영. 그나저나 너 도피유학 안 가냐?”


“…으음…”


“어, 깼냐?”




눈을 떠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은진의 얼굴이었다.




“…어멋.”




난 그녀의 무릎을 벤 채 누워 있었던 것이다.


민망해서 얼른 일어나려는 나의 어깨를 그녀가 가볍게 내리누른다.




“좀 더 누워 있어도 괜찮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그렇게 나를 눕혀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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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울적할 때는 자주 그녀와 함께 ‘모임’에 갔다.


술은 조금씩 늘었지만, 여전히 분위기엔 그다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그늘 아래서, 난 별 문제 없이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자신의 그룹에 데려가 놓고 어쩐지 나를 과보호하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뭐, 난 그게 싫진 않았다.


그런 생활이 지난 여름까지 이어졌었지.




“동복 입고 첨으로 얘기하는 거 같애. 너무하네. 연락 좀 하지.”


“미안… 잘 지냈지?”


“뭐, 나야 항상 잘 지내지. 하하.”




주택가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녀의 머리가 와일드하게 휘날린다.


한 손으로 가방을 둘러 맨 모습이 경쾌해 보인다.




“나 잠깐 안 나왔다고 ‘모임’ 계속 안 나온 거야?”


“아… 뭐.”


“난 너 왔을까 해서 이후로 계속 가 봤는데.”




지난 여름 ‘그 때’ 이후 나는 정기적인 ‘모임’에 나가지 않았고, 이상하게 은진과도 연락할 수 없었다.


2학년이 되어선 반이 달라졌기 때문에 우연히 보기도 힘들었다.


어쩌다 찾아가 봐도 그녀는 없었고…


난 지나치게 조용하게 지냈고, 걔는 이것저것 너무나 바쁜 애였다.




“노린 어떻게 지냈어? 그 동안…”


“…그냥 그렇지 뭐.”




사실 그냥 그랬던 것은 아니지.


너 못 보는 새 악몽같은 일이 한 번 있었고, 아빠랑 엄마는 별거 시작했고, 이안 오빠랑도 만났다니까.


마지막은 나쁜 얘긴 아니지만… 그것도 사실 원조가 아니었던가.


생각해 보면 그간 그녀를 간절히 보고 싶어한 때가 몇 번 있긴 했다.




“나 사실 너한테 전화 했었다…?”


“저, 정말?! 언제?”


“이번 학기 시작하구 몇 번. 안 받던데…”




그녀가 문득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어, 사실 좀 골치아픈 일에 말려서… 헤헷. 사고를 좀 쳤지.”


“싸웠어…?”


“아, 별 거 아니었어. 근데 우리 집 꼰대한테 쫌 쎄게 야단맞고 전화 잠깐 끊겼었다네~. 하하.”


“그랬구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별루.”




은진이 사고를 쳐...?


어쨌거나 그 이야기는 은진이한텐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저기 은진아, 크리스마스엔 뭐 할 거야?”


“아~아. 부산에 갈 거 같아. 외갓집.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그 때 이후로 올해까진 꼰대 말 듣고 살기로 해서 어쩔 수 없이…”


“에이, 너희 아빠한테 꼰대가 머야….”


“아, 미안. 뭐 어때. 히히…”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좋겠다. 외갓집두 가고…”


“좋긴 뭐가 좋아. 어른들이랑 따분하게시리.”


“…….”




어른 얘기 하니까 또 할머니 생각이 난다.


갑자기 그녀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 너 혹시 크리스마스에 혼자니? 내가 같이 있어줄까?”


“아, 아니 됐어. 혼자 아냐.”


“정말? 에이.”




은진이는 뭔가 굉장히 실망하는 것 같다. 그렇게 가족이랑 보내는 게 싫을까.


분명히 작년에 엄마는 일 때문에 크리스마스 이브에 안 계셨지…


설마, 올해는 아빠도 없는데.




그녀와의 수다 덕에 눈 깜짝할 사이에 집에 다 왔다. 땡쓰 은진.


집으로 들어가는 어귀에서 그녀와 작별하면서, 핸폰을 꺼내본다.


…여차하면 이안 오빠한테 놀아 달래야지. 후훗.


난 멀어져 가는 은진이의 날씬한 뒷모습으로부터 눈을 떼고, 평소보단 덜 우울하게 대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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