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감기 - 2부 1장

본문

감기 - 08 사랑의 시작, 안단테 1




블라인드가 햇살을 반쯤 가리고 있는 조용한 사무실안, 두 명의 남자가 서로 마주 보고 있


다. 나이가 많은 듯한 중년의 남자가 가죽 의자에 앉아 자신의 앞에 있는 이를 바라보고 있


다. 그는 책상앞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이를 나무라는지 몇 번의 혀 차는 소리가 나지막


히 들린다. 




" 쯧, 자네 이번 일은 좀 심했어."


"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본사에서 2년 이상 근무한 직원의 로테이션은 원래 


인사규정에도 명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걸 부서장들의 이기심으로 잘 사용하지 않을 뿐


이지만요. 전 사칙에 의거한 정당한 요구를 한 것입니다."


" 그래도 말이야, 솔직히 그게 아니라는 것 다 알잖아. 이 일로 자네가 그의 눈 밖에 났다는


게 중요하잖나. 기획실장이 노리고 있어. 당분간 조심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홍보부장, 강재석의 얼굴에 어린 걱정스러움이 선우영의 눈에 가득 들어


온다. 그 표정 만큼 그가 선우영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그 마음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 예. 감사합니다. 부장님."


" 뭐 별 것도 아닌데... 그리고 이건 그 능구렁이의 농간이 슬슬 시작한 건 지도 모르지만.. 


며칠 후 공채가 있는 것 알지?"


" 예, 신입을 좀 뽑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저희 부서에도 결원이 생겨 관심을 


가지고 있었구요."


" 그 결원이야 자네가 직접 만든 거고.. "


" 훗훗.. 집으로 보내 준 겁니다."


" 집으로 라니?"




재석은 우영의 엉뚱한 대답에 다소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으며, 고개를 모로 돌리


며 눈 앞에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마치 기대한 만큼의 대답을 기다리는 어린 아이의 


장난스러운 표정이라고 할까.




" 한혜진씨, 원래 집이 부산이더군요. 대학교까지 부산에서 나고 자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족도 현재 부산에 거주하고 있구요. 본사에 입사한 후 제가 알기로는 단신으로 상경해서 


살고 있었다고.. 뭐, 그 사람이 실제로 누구와 살았던 중요한 건 아니지만요."


" 그래서.."


" 조직사회에서 가장 중요시 되고 문제시 되는 것은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그것


을 어긴 겁니다. 저희 부서에서 일어난 일을 장난으로 퍼트렸을지는 몰라도, 자신의 행동으


로 피해를 본 사람이 부서내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발령지를 부산으로 강제


한 겁니다. 그 사람은 그곳에서 절 원망하기 전에 정신부터 차려야 할 겁니다. 자신이 저지


른 행동이 어떤 것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경고는 남아있는 여직원들에도 동일하게 주어


지는 것이구요. "


" 한 마디로 본보기였다.. 이건가?"




노회한 만큼 정곡을 찌를 때는 과감하게 찔러오는 재석. 이미 그의 이런 행동에 익숙한 듯 


우영은 덤덤하게 받아넘기며 대답을 마저 이었다.




" 어떻게 보면 그렇지요. 이미 여러번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따르지 않는 사람에겐, 기


회가 있을 때 확실한 증거를 잡아 날려 버리는 것. 이건 제가 부장님께 배운 겁니다. 그리


고.. 저 때문에 이번 일을 수습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 뭐, 자네가 나한테 미안해 할 일이 뭔가.."


" 그래도 부장님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부산까지 보내지 못했을 건데.. 인사부에 힘써 주신 


것 알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솔직히 이 일이 실패했으면 제가 더 우수운 놈이 될 뻔


한 일이었으니까요."


" 알고 있으면 됐네... 그리고 자네가 입사해서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한 말을 기억하나?"




마치 그때의 일이 생각이라도 난 듯이 우영은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부장의 물음에 


대답을 했다.




" 후후, 한번 동문은, 영원한 동문...이라구요."


" 그래, 나이가 들어 이런 자리에 있게 되면, 별 것도 아닌 인연에 의지하게 되네. 그리고 그


것들을 자기 주위에 하나 둘씩 쌓아두기 시작하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단단한 성벽처럼 말


이야. 자넨 날 지키는 그 성벽의 돌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면 되네. 참 삭막한 표현일지 모르


지만, 자네한테 만큼은 그런 것을 숨기고 싶지는 않아. 자네가 말한 신뢰라는 건 이런 거겠


지?"




우영은 부장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듣고,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담아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있었다. 그러다 잠시 생각이 난 것이 있는지 고개를 살짝 들어 부장에게 질문


을 했다. 




" 저, 부장님. 조금전에 공채와 결원에 관한 말씀을 주셨었습니다."


" 아..이런, 나이가 있으니.. 자네 하나 필텐가?"




담배 하나를 꺼내며 권하는 재석의 말에 우영은 정중히 거절을 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필터를 책상에 몇 번 두들기던 재석은, 담배의 끝에 약간의 침을 묻힌 후 불을 붙이기 시작


했다. 매케한 연기가 블라인드의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받아 부채살처럼 갈라지고 있었


다.




" 조만간 알게 될테지만.. 공채에 지원한 애들을 본사에서 테스트를 할 모양인데, 자네가 시


험 감독관으로 들어가 있을 거네."


" 네? 그건 인사부와 경영지원부에서 하던 일인데.."


" 그러니 농간일 것 같다는게 내 말 아닌가. 그러니 조심하게. 조금이라도 흠집이 잡히면... 


이번에는 내 힘으로 힘들지도 몰라. "




기획실 - 경영지원부나 기획조정실, 그리고 재무관리실처럼 사내 조직의 실세는 아니지만, 


발언권 만큼은 무시할 수 없는 회사내 상위서열의 부서. 특히 관리직에서 경영진으로 올라


가는 것을 꿈꾸는 남자직원이라면 기획실을 거쳐 해외 업무를 몇 번 하다가 돌아오는 것을 


꿈으로 여기는 만큼, 조금만 기회가 되면 그곳과 연계된 부서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향후 경


영진 합류를 꿈꾸는 이들이 한번 쯤 몸담는 곳인 만큼 영향력이 큰 기획실장이 지금 선우영


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부장실에서 나오며 그의 걱정어린 말을 듣고나니 그제서야 자신이 얼마나 큰 돌멩이를 호


수에 던졌는지를 실감하게 된 우영은, 혼잣말을 되내이며 가라 앉은 기분을 스스로 추스렸


다.




" 뒷끝이 심하기로 유명한 그 늙은이가 날 노린다고 했으니.. 당분간은 정말 조심해야 겠어."




부서로 돌아오니, 여직원들이 모두 그의 얼굴 표정을 살피며 의식하고 있었다. 우영은 자신


을 보는 직원들의 얼굴을 한번 훑어 본 후 말을 했다.




" 잠시 주목해 주길 바래요."




뭔가 묻고 싶은 것이 많은 표정이지만, 우영의 말에 억지로 참는 듯한 표정이 여직원들의 


얼굴에 가득하다. 




" 음.. 다들 하시겠지만, 함께 일을 하셨던 남수진씨가 부산으로 전보발령을 받으셔서 떠났


습니다." 


" 저 과장님.. 한혜진이었는데요."




그 목소리가 난 쪽으로 선우영이 서늘한 눈빛으로 한동안 바라보자, 눈길을 받은 여직원이 


고개를 숙인다.




" 그 분이 떠나고 난 자리가 좀 클지도 모르지만, 저를 포함한 남은 분들간에 또 다른 간격


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경고 드리는데.."




우영은 잠시 말을 멈춘 후 여직원들을 돌아보며 그들과 한번씩 눈을 마주친다.




" 우리 부서의 룰을 지키지 않는 분. 이번에는 부산으로 보냈지만, 다음에는 그 정도 편의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한 말도 지킬 자신이 없는 분은 앞으로 그런 자리에 오지 마십시


요. 그리고 그런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도, 사내에서 필요없는 입놀림이 어떤 결과를 


불러 오는지는..




우영은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을 주고 말을 천천히 이었다. 




" 이번 일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이만 전달 끝. 일 보세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다들 다시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예전 처럼 활기 넘치


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의 얼굴에는 무언가 잔뜩 주눅이 든 듯한 표정들을 숨기고 


있었다.




우영이 부서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꺼져있던 모니터를 켜고 일을 시작하려 하는데, 모니터


의 한쪽 구석에서 빤짝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끔 다른 부서 와의 업무 때문에 사용하


는 사내 메신져의 알림 표시였다. 그 창을 클릭하자 작은 메신져 창이 화면 가운데 표시된다.




[ 과장님...고맙습니다.]


[ 응당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번 일은 빨리 잊으세요.]


[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다음에는 이렇게 도와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지나간 일을 떠올리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감기가 올 것 같았다. 특히나 뒷끝이 안좋기


로 유명한 기획실장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금은, 그의 두통은 부장실에 


가기 전 보다 더 심해지고 있었다. 우영은 아픈 머리를 살짝 두들기며 메신져 창에 텍스트를 


적기 시작했다.




[ 이번 일의 모든 원인 제공은 혜영씨에게 있다는 것. 잊지 마세요. 말을 퍼트린 자도 나쁘


지만, 원인 제공자인 혜영씨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 예.............]


[ 사소한 것이라도 룰은 지키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저도 잊을 테니, 업무에 충실하


세요. ]


[ 고맙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는 우영.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의 앞에 앉아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아내 유경에게 무언가 말을 할 것 같은 표정이다. 말 할 것이 있는데 망설이고 있


을 때의 그의 특유의 습관인 물 컵을 만지작 거리는 것을 본 유경이 먼저 운을 띄운다. 




" 할 말 있는 것 같은데.." 


" 아냐.." 


" 음.. 말해 봐. 똥 마려운 강아지 처럼 말고.. " 


" 후우..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러자 식탁앞에 있는 반찬들을 하나 둘씩 자기 쪽으로 몰아가는 유경. 




" 말 안 할거면 이거 먹지마. 피곤한데도 기껏 만들었더니.. 배가고파 봐야 알지? " 


" 아냐. 먹을 거야." 


" 그럼 밥값을 해. 뭔데?" 




물 컵을 만지며 한동안 망설이던 우영은 유경을 쳐다보다 다시 밥을 먹으며 흘리듯 말을 하


기 시작한다. 




" 당신 회사... 들어갈 자리 있을려나?" 


"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회사에서 짤렸어?" 


" 후우.. 그런 건 아닌데. 아마도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 왜? 아.. 함부러 입 열고 다닌다던 그 년 보낸 것 때문에? " 




눈치가 유난히 빠른 유경은 몇 마디의 말만 듣고서도 우영이 고민하고 있는 일의 앞뒤 정황


을 한번에 파악해 버렸다. 




" 응. 기획실장이.. 걔를 눈여겨 봤나 봐. 부산으로 보내 버렸더니.. 날 노리고 있데." 


" 뭐야! 뭐 그딴 새끼가 다 있어? 늙은 새끼가 젊은 여자 눈여겨 봐서 뭐 어쩔라고? 첩이라


도 삼을 거래? 참네.. 그딴 회사 당장 그만둬. 걱정말고 우리 회사에 오면 돼. 진작 같이 일


했으면 이런 일도 안당하잖아." 




밥숟가락을 들고 흥분해서 말을 하는 유경의 표정이 재미있는지, 한참 웃으며 보고 있다가 


그녀의 표정이 살벌해서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우영. 




" 웃기잖아...." 


" 뭐가? 나랑 일하는 게 뭐가 웃겨? 같이 출퇴근 하고 좋잖아." 


" 그게 아니라.. 생각해봐. 여동생이랑 대학을 같이 다니고, 사회에 나와서는 마누라와 직장


을 같이 다녀봐. 이게 뭐야? 웃기지.. " 


" 칫, 별게 다 웃기네. 사돈에 팔촌까지 끌어들여 회사 다니는 애들 많아. 왜 그래? 평소 같


지 않게 그까짓 일에 의기 소침한거야? 그만 두라니까. 대신 퇴직금은 확실히 챙기고 와." 


" 나, 당신 회사에 가면 직급은 뭐야?" 


" 전임연구원 정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의 대답에 우영의 표정이 묘해진다. 




" 그럼 당신 밑이네." 


" 서러우면 나보다 높은 학위 따던가... 왜 내 밑이라서 싫어? 자기는 집에서도 내 밑이잖


아. 안그래? 큭큭 " 


" 아.. 그러네. 밤에 잘 때도 .. " 


" 으이구, 이 변태야. 요즘 힘이 남는가 본데.. 그래 한번 오늘 내 밑에 깔려보자. 응? " 




들고 있던 밥 숟가락을 놓고 지그시 바라보는 유경의 표정에 우영은 식은 땀을 흘리며 남은 


밥을 먹어야만 했다. 




며칠 후, 입사지원자들을 대상으로 한 업무적성 검사가 본사 3층의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선우영은 사무실에서 여직원들과 아침 미팅 자리에서 오늘 자신이 다른 곳의 일을 하게 되


었음을 알렸다. 




" 이상의 이유로, 오늘은 제가 부서장의 소임을 할 수 없으니, 전결사항이 있는 것은 내일 


오전으로 다들 미뤄주시길 바랍니다. 이만 전달 끝. 일 보세요." 




우영은 간단히 아침 미팅을 끝을 낸 후,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얼마나 많은 이


들이 지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엘리베이터가 3층 이상으로 올라와 있는 것이 없었


다. 올라오지 않는 엘리베이터가 짜증나는지 우영은 혼잣말을 하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 


있었다. 




" 내가 사장이면.. 3층까지 엘리베이터 타고 다니는 것들 다 짤랐어.." 


" 그렇지?" 




대답을 바라지 않았던 혼잣말에 뜬금없이 들리는 소리에 놀라서 돌아보니, 홍보부장이 귀


를 후비면서 웃고 있었다. 




" 왜 여기 계세요? 


" 뭐가?" 


" 여긴 부장님이 계신 곳도 아닌데... "


" 쫄따구들이 일 잘 하나 둘러보고 있는 중인데? 자넨 모르나 본데 이것도 부장 업무의 일


환이라구. 아~ 부장이 된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없지?" 


" 그럼 지금은요?" 




우영를 바라보며 씨익 웃으며 능글맞게 말을 하는 재석. 




" 열심히 부하직원들을 독려했더니.. 땀이 나네. 사우나나 다녀와야겠어." 


" 하~... " 




우영의 입에서 미친년 똥꾸멍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언제나 천하태평인 부


장의 넉살에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향해 푸념을 늘어 놓는다. 




" 사우나 가서 언제 돌아오실려구요.. 에효." 


" 왜 자네도 가고 싶어서? 차장이 되고 나면 내가 같이 다녀주지. 후후." 




그때, 그렇게 기다리던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고 3층과 지하를 각각 누르는 두 남자. 엘리베


이터를 타자 주위를 신경쓸 필요가 없어진 탓인지, 조금전과 표정을 달리하며 재석이 우영


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 마침, 우리 둘 뿐이니 하는 말인데.. " 


" 예, 부장님. " 


" 명심하게. 오늘 절대 책잡힐 행동을 하면 안돼. 무슨 말인지 잘 알거야. " 


" 항상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걱정은 개뿔..." 




우영의 말이 멋쩍은지 괜히 양복 상의를 손으로 털며 말을 하는 재석. 그러나 그의 표정에 


남아있는 것은 장난이라 하기에는 진중하기만 했다.




" 자넨 물가에 내놓은 애 같아서... 눈뜨고 보고 있어도 내가 불안해." 


" 큭큭.. " 


" 왜, 내 말이 웃긴가? " 


" 아.. 좌송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부장님." 


" 그럼? 뭔가." 




한동안 웃음을 흘리던 우영은 재석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 그 말, 제가 제 여동생에게 늘 하는 말이어서.. " 


" 훗, 원래 다 그런거야. " 




곧 3층에 도착하고 내리기 직전, 문이 열릴 때 우영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른 채 부장에


게 말을 이었다. 




" 부장님.. 늘 감사드립니다. 만일.. 짤리더라도 잊지 않겠습니다. 후후." 


" 안짤리도록 노력하는게 아니라.. 짤리더라도 인가?"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 제 뜻대로 되는게 있었나 싶습니다. 그때 사고처럼요. " 


" 그런 걸 하나씩 알아가는 게 바로 나이가 드는 거야. " 




그 말과 동시에 엘리베이터는 굳게 닫히고, 우영은 수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찬 3층을 걸어가


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로 북적이는 대회의실 앞 복도. 이번의 공채 테스트를 위해 차출된 


부서 스탭들이 한쪽에 모여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영은 그들의 중심에 있는 인사부


장께 가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 인사부장님, 디자인 지원팀 선우영입니다." 


" 아, 자네 왔는가? " 




잠시 주위의 애들을 다른 곳으로 물리고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는 인사부장, 안명훈. 




" 자네 부장에게 이야기는 들었지?" 


" 예.. " 


" 그래, 뭐 나야 자네 심정을 다 이해하니까 나도 명령서를 써준 것이지만.. 조직안에서 책


임 이라는 것은 사칙에 국한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 항상 명심하게. 사람과 사람. 그들이 


만들어내는게 사칙보다 더 위에 있어. 더 무섭고.. " 




재석이 얼마나 부탁을 했는지 인사부장이 우영을 바라보는 표정이 평소 같지가 않다. 




" 이번 일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감싸주시느라 힘드셨을 건데 죄송합니다." 


" 아냐, 가장 피곤했던 건 자네 부장일세. 나중에 그 양반에게나 따로 인사하게. 비싼 술이


면 만족하는 성격이니 어렵지도 않아." 


" 늘 감사합니다. 부장님." 


" 뭘.. 시간이 되가는군." 




다시 조금전의 자리로 걸어가는 명훈.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우영을 돌아 보며 


말을 이었다. 




" 아, 그리고, 자넨 딱히 할 일은 없어. 다만, 명심할 건 누가 자넬 노리고 있는지는 알고 있지?" 


" 예.. 좀 으스스 한 걸요." 


" 그 사람은 눈 밖에 나면 몇 년 동안 숨기고 있다가 뒷통수치는 타입이라.. 사내에서 건드


리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러니 오늘 각별히 조심하게. 시험장 안과 밖을 왔다 갔다 하다가 


지각생이 있으면 조용히 안내나 해주고, 그 정도만 하면 돼. 나머진 우리 애들이 할거야." 


" 부장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그를 바라보던 명훈은 우영의 어깨를 살짝 치며 인사부 스탭들


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별일 없을 거야. 시간이 슬슬 된 듯 하니까 가서 준비하세. 자네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


가 시험이 시작되고 문 근처에 있는게 덜 위험할 거야. 혼자 복도에 서 있는데 무슨 일이 생


기겠나. " 


" 예. 부장님. " 




잠시 후 스탭들의 안내에 따라 복도에 대기하고 있는 입사 지원자들이 시험장인 대회의실 


안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몇 스탭들은 화장실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응시자들을 


찾아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우영은 복도 한 켠에 우두커니 서있는 자신의 모습이 한


심스러워 담배가 피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복도에 서 있는 것이 업무인 상황이었다.




한동안의 소란스러움이 배수구를 통해 빠져나가는 물처럼 대회의실을 중심으로 스며 들어


가고, 그 후 모두가 사라진 조용한 공간에서 혼자 남아 복도를 지키고 있는 우영. 바닥에 장


식된 대리석 조각을 보며 이게 국산일까 아닐까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


다. 그때 그의 귀로 다급하게 뛰어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이었


다. 




" 헉헉.. 헉헉.. " 




숨이 턱까지 올라왔는지, 거세게 숨을 몰아 쉬며 우영을 지나쳐 달려가는 긴 머리의 여인이 


한 명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우영은 시험장이라고 적혀있는 종이를 보고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갈려고 하는 여인의 가려린 어깨를 잡고 그녀에게 말을 했다. 




" 잠시만요." 


" 예? 헥핵.. " 




얼마나 뛰어왔는지, 아직도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얼굴에 땀을 흘리고 있는 여자는 우영의 


제지에 마치 방금 불합격 통보를 받은 듯한 굳어진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


다. 




" 입사 지원자 이신가요? " 


" 예, 늦어서 죄송합니다. 들어갈 수 없을까요?"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무슨 이유로 늦었는지 모르지만 뛰어오며 


얼마나 놀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잔뜩 긴장한 채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


라리 한숨을 돌린 후 들어가는 것이 그녀에게 더 좋을 것 같았다.




" 일단 숨을 돌리고 나서 들어가도 안늦어요. 문항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 거든요." 


" 예.. " 




그의 말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 말을 하는 여인. 그러나 마음은 계속 들어가고 싶은지 자


꾸 회의실 문을 바라 본다. 이렇게 다급한 마음 상태로 들어가 봤자 테스트에서 실수할게 뻔


할 거라는 생각이 든 우영은 그녀의 한 손을 잡아 복도의 막다른 끝으로 끌고가기 시작했다. 


조금전 인사부장과 조용히 이야기를 했던 그곳. 




" 잠시 이리 와봐요." 




우영은 그녀의 팔을 잡아 끌고 복도 한 켠에 있는 간이 생수대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작은 


종이컵을 꺼내 물을 채워 그녀에게 주며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 자, 이거 마시고, 숨을 좀 돌린 후 들어가도록 해요. 잔뜩 긴장한 채로 입실하면, 자기도 


모르게 테스트에서 실수를 하게 될 테니까요." 


" 정말 감사합니다. " 




그리고 우영이 건내주는 물을 조심스럽게 마시는 여자. 차가운 물을 마신 후, 몇 번 길게 숨


을 내쉬며 숨을 고르고 있는 모습이 처음 보았을 때 보다 많이 안정된 것 처럼 보였다. 그녀


가 놀랬던 가슴을 어느 정도 진정시킨 것 같자 우영은 그녀의 손에 들린 수험표의 번호를 본 


후 자신을 따라오게 했다. 




" 들어가게 되면 다들 시험을 보고 있을거예요. 그러니 이 문을 열고 나서는 제가 자리를 찾


아 주고 나갈 때 까지 절대 말을 하면 안됩니다. 아셨죠? 시험지와 답안지도 제가 알아서 가


져다 드릴 테니 걱정말구요. 자리에 가만히 앉아 계세요." 


" 정말 감사합니다." 


" 뭘요. 이짓 하라고 위에서 시켜서 하는 일인데요. 큭큭. 뭐 벌받는 중이지만요. 자 그럼 들


어갑시다. 시험 잘 치세요." 




우영은 조용하게 문을 열고 대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만,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열기가 시험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문 앞에 대기


하고 있던 스탭에게 고개를 끄떡여 나름의 인사를 하고 그녀를 데리고 수험표에 따라 배정


된 자리를 찾아주었다. 그리고 시험지와 OMR 카드를 가져다 준 그는 대회의실의 앞자리에 


있던 인사부장에게 짧막하게 눈인사를 한 후 그의 옆에 서서 대기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


인채 혼신의 힘을 다해 시험지를 들여다 보는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눈 앞에 들어왔다.




딱히 보아야 하는 시험과목도 없는 이런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감독관으로 있는 만큼 지원자들을 하나씩 훑어보며 지켜보는 우영. 열심히 집중하며 문제


를 풀고있는 응시자들을 보니 마치 중세의 과거 시험장에 온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종이


가 넘어가는 소리, 사각거리며 필기구가 종이위를 미끌어 지며 만들어 내는 소리들이 대회


의장 안을 조용하고 낮게 지나가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이 자리에 있지만, 그래도 조금 전의 그녀에게 가장 많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우영도 어쩔 수 없었다. 지각해서 그런지 잔뜩 긴장하고 있던데, 시험은 잘 보고 있을려나 


하는 노파심에, 우영은 옆에 있는 인사부장에게 실수하는 지원자가 없는지 보고 오겠다는 


말을 하고 회의장을 한바퀴 돌기 시작했다. 




벌써 시험은 40분을 넘긴 상황. 이제 반도 남지 않은 시간안에 실수없이 마무리하는 것만


으로도 취업의 관문에 한 발 다가서는 이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우영은 


혹시 그녀가 잔뜩 긴장한 나머지 실수나 하지 않을까 염려되기 시작됐다. 곧바로 그녀의 곁


으로 가게 되면 기획실에서 나온 스탭의 눈에 띄이는 것은 당연한 일. 최대한 감독관의 자연


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는 우영은 구석에서 부터 조금씩 돌아다니며 떨어진 필기구를 주워


주거나, 마킹을 다시 하기를 요구하는 응시자의 OMR카드를 회수해서 다시 바꿔주면서 천


천히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렇게 어렵게 그녀의 곁에 도착해서 시험지와 OMR카드를 보니 우영은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초보도 하지 않는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확실하


다면 그녀는 분명 시험지에 자신이 표시한 것과 전혀 다른 답을 카드에 정신없이 적고 있었


던 것이다. "이럴까 봐 숨돌리게 하고 물까지 줬더니.."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대로 


놔둔다면 찍기의 달인이 아닌 이상 탈락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저절로 입밖으로 세


어나오는 한숨을 애써 삼키며 펜으로 정신없이 답안지를 작성하고 있는 그녀의 옆에 다가 


섰다.




기획실 스탭들의 눈에 띄게 행동하면, 이 여자도 선우영 자신도 모두 위험할 수 있는 상황


이었다. 뭔가 자연스러운 상황을 연출해야 하기에, 우영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의 손에 


있는 컴퓨터용 사인펜을 빼앗으며 말을 이었다. 




" 긴장되서 실수하셨군요. 한 문항에 두개를 마킹하면 오류가 납니다."




우영은 그 말과 동시에 그녀의 OMR 답안지 몇 곳에 재빨리 점을 몇개 찍었다. 그리고 가지


고 있던 붉은펜으로 OMR카드에 무효 표시를 한 후, 아직도 이 상황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


다는 표정으로 불안해하는 그녀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말을 이었다. 




" 새 카드를 가져다 드릴께요."




그리고 우영은 인사부장에게 가서 간단히 보고를 하고 새 카드를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 아직은 시간이 있습니다. 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기입하세요. 10분이 남았을 때 스탭들이 


알려줄 테니까요. 긴장하면 한칸씩 미뤄서 답안을 기입하거나, 엉뚱한 답을 적는 실수가 나


올 수도 있거든요."




그녀는 우영의 그 말을 다 듣고서야 왜 답안지를 빼앗아 갔는지 알았게 된 것 같았다. 불안


해 하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잠시 어리더니, 이윽고 고개를 숙이며 다시 문제를 풀기 시작


했다. 우영은 그런 그녀의 어깨에 올린 손에 살며시 힘을 주며 긴장감을 풀어주었다.




" 천천히.. 신중하게 하십시요. 실수는 당락을 결정짓습니다."




그녀에게 나지막히 충고를 해 준 우영은 인사부장에게 다시 돌아와 그의 옆에 서 있었다. 




" 조금전 위험했네.."


" 죄송합니다."




누군가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것인지, 자신의 입을 가리고 다른 곳을 보는 듯이 말을 하는 


명훈. 그는 다소 불만스러운 말투로 우영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 이 자리에 우리 애들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 자네도 알잖아.."


" 지각해서 긴장했는지 실수를 했더군요."


" 섯부른 호기가 소중한 직장을 잃게 만들 수도 있어. 그걸 왜 몰라!"




명훈은 잠시 말을 끊은 후, 짧은 한숨을 내 쉬었다.




" 후우, 우리 애들 단속은 내가 할 수 있지만.. 위에서 내려온 저 4명은 나도 어쩌지 못해. 아


마 각오해야 할거야. 아마 그 사람의 귀에 들어갈거야."


" 죄송합니다."


" 자네 부장이 그렇게 걱정하더니.. 왜 그러는지 내 이제 알겠구만.."




우영이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명훈이 지나가는 말로 말을 한다.




" 자네, 어떤 이유에서든 내 밑으론 들어올 생각을 말게. 자네가 내 밑으로 오면 내가 제 명


에 못살것 같아."




부하를 쥐고 풀고하는 것에 노련한 인사부장이 그런 말로 분위기를 풀어주자, 선우영은 바


닥에 뭔가 떨어트린 것을 주으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흘렸다. 재석도 그렇지만, 명


훈도 그에게는 큰 형님처럼 바라지 않고 도와주는 그런 존재였다. 투박하게 말하는 그 말속


에 들어있는 깊은 씀씀이에 우영은 장난 반 진담반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 큭큭.. 아마 저희 부장님이 절 놓아주지 않으실 겁니다. "




그 날의 일은 그렇게 지나가고, 몇 주의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홍보부장과 선우영은 기획


실장이 노리고 있던 그날이 아무런 일도 없이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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