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감기 - 1부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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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 02




파티션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바보 같았던 아침 출근길. 왜 그런 말을 


해서 스스로 약점을 잡혀버리고 말았는지. 결코 평소의 나같지 않았던 모습에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까지 했다. 멍청했다. 아무리 약기운이고, 그렇게 무서워하는 감기가 걸린 상태


였다고 해도 아침의 말은 분명히 실수였다.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감기 기운에, 어제 마셨던 유자의 향이 그리워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탕비실에 가서 선반을 뒤져보았지만, 역시나 유자차가 들어있는 병은 보이지 않았


다. 도대체 어디 있는거야 하는 생각에 거칠게 몇개의 선반을 열어보다 포기하고 옥상으


로 올라갔다. 




아침부터 되는 것이 없다는 갑갑한 마음에 양복 상의를 의자에 던져두고 옥상에 담배를 


피러 갔다. 하얀 구름처럼 퍼져나가는 담배연기가 지금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 처엄 느


껴진다. 언젠가는 끊어야 할 테지만, 아직은 이 담배가 없으면 왠지 살아갈 맛이 안난다고 


할까. 의지할 곳이 없어 벼랑에 선 느낌일 때 한자락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안도감. 


그것이 내가 담배를 필 때 마다 느끼는 감정이었다. 담배를 폈으면 이제 양치질하고 손을 


씻어야지.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 집사람 때문에 생긴 묘한 습관. 담배 피면 손씻고 양치질 


하는 웃기는 습관은 모두 그녀 덕분이다. 




담배피고 돌아오니 내 책상위에 유자차 한잔이 놓여져 있었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굳


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따뜻한 종이컵 하나. 그리고 파티션 넘어로 내 얼굴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김대리. 언젠가 저 웃음을 얼어붙게 만들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양복을 잘 걸어 놓고 모니터를 켜고 보니 몇개의 메신져 


창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하나를 열어 보았다. 윤희씨였다. 




[아침에 유자차 고마워. 잘 마실께.]


[별 것도 아닌데요. ^^]


[오해하지 말구 들어줬으면 하는데..]


[네 과장님.]


[윤희씨가 이렇게 챙겨주는 거 나 무척 고맙고 기뻐.]


[예..]


[하지만, 좁은 부서안이다 보니, 윤희씨 입장이 걸릴 수 밖에 없어.]




본격적으로 말을 시작하자 글을 쓰지 않고 물끄러미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게 파티션 


넘어로 그녀의 뒷머리로 알 수 있었다. 




[내 자리가 자리다 보니, 나보다 윤희씨를 더 생각할 수 밖에 없어. 김대리도 이제 아는데 


사내 소문 나는 건 한순간이야. 다음부터 내가 할께. 윤희씨 마음만 정말 고맙게 받을께.]




대답을 하지 않고 한동안 모니터를 바라보던 그녀는, 파티션 넘어로 내 얼굴을 잠시 쳐다


보다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그것을 번갈아 보며 재미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김대리. 저 여


자. 사람을 가지고 노는 듯한 표정의 저 얼굴은 언젠가 한방 먹이고 싶어지는 표정이었다. 


몇개의 열려있는 메신져 창에서 업무에 관계된 타 부서와 메신져질을 한 후 마지막 창을 


열었다. 김대리였다. 




[ㅋㅋㅋ ^^;;..]


[할 말 있으면 터놓고 하지? 사람 가지고 놀지 말고.]


[후후,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세요. 과장님은 저한테만 너무 그러신다..ㅋㅋ]


[요 며칠 사이 김대리 웃음이 그게 아닌 것 같은데..내 노파심인가?]


[그렇게 느끼셨다면 그런거겠죠. 제가 당사자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요? ㅋㅋ]




자꾸 메신져 창에 ㅋㅋ 거리는 그녀의 말투까지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남자라면 속시


원히 말하라고 주먹이라도 날리겠는데. 한참을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간단하게 쪽지를 보


낸 후 탕비실로 걸어갔다. 




[조용히 할 말있으니까, 탕비실로 와요.]




차가운 물을 종이컵에 받아 마시고 있으니 조금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


직도 채 가시지 않은 감기 기운탓에 머리는 조금전 보다 더 어지러워졌다. 한동안 머리를 


한손으로 감싸고 인상을 쓰고 있으니 조용히 문이 열리고 탕비실로 김대리가 들어왔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긴장된 얼굴로 문옆에 조심스럽게 서있었다.




"저 왔어요. 과장님."


"지금까지 부서 내에서 어떤 소문이 나더라도 한 번도 터치한 적이 없지만, 만약 이번 일


에 대해 어떠한 소문이 난다면, 제일 먼저 김대리 당신에게 책임추궁할 테니까 알아서 해


요."


"아니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벌써 책임추궁 운운하시는 거예요. 제가 그 말을 언제 소문


이라도 냈데요? 그리고 제가 과장님에게 무슨 말이라도 했었나요? "




말문을 열자 마자 쫑알거리면서 대들기 시작하는 김대리. 이래서 내가 여직원들과 말을 


잘 안하려 하는데. 분위기는 자기 스스로 다 띄워놓고 일을 벌리면 언제나 모르쇠로 일관


하는 여직원들의 행태가 오늘따라 짜증나기 시작했다. 어차피 약점 잡힌 건 나니까 죽이 


되건 밥이 되던 수습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쫑알 거리기 


까지..




"말을 안했다고 그것 하나만으로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어린 아이들이나 하는 짓 아닌


가? 자신의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도 책임지는 것이 사회인이라 생각하는데. 김대리 생각


은 아닌가 보죠? "


"여기서 그 말이 왜 나와요?"


"홍대리와 내가 김대리에게 충분히 오해받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 알아요. 하지


만, 과정을 덮어두고 결과만을 보고 다른 곳에 말을 퍼트리는 것 만은 하지 말라는 말이예


요."


"아니 제가 언제 사내에서 그런 말이나 퍼트리고 다녔다고 그러세요. 오늘따라 과장님 왜 


자꾸 이러세요? 예?"


"아니, 아마츄어처럼 왜 이래? 우리 부서에 퍼지는 소문은 김대리와 박혜영씨 둘이서 만든 


작품이라는 거, 모른척 하고 있지만 나도 다 알고 있는 상황인데. 잡아 뗀다고 가려질 일도 


아니잖아. 김대리가 의심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니까 날 건드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홍대리는 내버려둬요. 마지막 부탁이니까. 이런 소문나서 시집도 안간 여자가 어떻게 될지는 


같은 여자로써 김대리도 잘 알잖아. 건드릴려면 나 하나로 만족해. 그것까지는 막진 않을테


니까. 같은 여자니까 잘 알거 아냐! 회사에서 그런 소문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지."


"단지 그것 뿐인가요?"


"나와 아무런 사이도 아닐 뿐더러, 아직 결혼도 안한 미혼인데, 유부남인 나와 엮인 듯한 


소문이 날까 걱정되서 그래. 나야 생각도 없을 뿐더러, 김대리가 장난칠려고 하면 그렇게 


해도 좋아. 하지만 재미로 던진 말 한마디에 윤희씨 회사생활이 어떻게 될련지는 한번만 


생각해 주길 바래."




내가 한 말에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한참을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가 묘한 표정을 지으


며 대답을 했다. 




"박혜영이 아니라 주선혜인데요. "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튀어나오는 내 실수에 웃으며 대꾸하는 그녀. 기도 안차서 나도 


맞받아쳤다.




"우리 부서에선 김대리 이름만 안틀리면 되는거 아닌가?" 


"제 이름, 제대로 기억은 하세요? 성이야 대충 찍어도 맞추는 흔하디 흔한 김씨니까 어떻


게 맞춘건지 어떻게 알아요? 과장님이 여직원 이름 안외우는거 우리도 다 안다구요."


"내가 왜 몰라?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대리 이름은 알지. 김효진! 맞잖아?"




한참을 바라보던 김대리의 묘하게 비틀린 입술 모양이 더 짙어지더니, 잠시 한 숨을 쉰 후 


내게 한가지 부탁을 했다. 




"에휴..내가 과장님께 뭘 더 바라겠어요. 차가운 물한잔이나 떠줘요. 몇 년을 함께 지낸 직


원 이름도 모르는 바보 과장님." 


"틀렸나? "


"틀렸으니까 어서 물이나 줘요. 차가운 걸로."




어차피 애 낳고 좀 있다 보면 그만둔다고 떠나갈 여직원의 이름이 틀려도 뭐 대수라고 하


는 심정으로, 내 뒤에 있던 생수통에서 차가운 냉수 버튼을 세차게 몇 번 눌러 물을 받아 


반쯤 마신 후 김대리에게 건내주었다. 




"아니 왜 물을 먹던 걸 줘요? 새걸로 다시 줘요."


"그거나 이거나, 그냥 대충 먹어. 김대리 말 마따나, 몇 년을 함께 살앗는데 가족같은 식구


끼리 물 잔도 함께 마실 수 있지. 쭈욱 마셔요." 


"칫, 이럴 때는 농담하죠? 평소에는 늙은이 처럼 깐깐하게 잔소리나 하더니.."


"당신도 대리 떼고 과장 되봐. 직원들끼리 웃고 농담하는 그 시간 조차 도태되는 기분이


야."


"과장님이 퍽이나 그런 걱정을 하시겠다."




차가운 물을 마시고 있는 그녀를 보다가, 녹차 생각이 나서 두잔의 녹차를 타서 하나를 건


내 주었다. 




"기가 막혀..."


"또 뭐가?"


"책 잡힌 거 같으니까 평소에 안하던 이런 것도 해주는 거 아네요? 틀렸어요?"


"세상 참 각박하게 사네. 그런게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꼭 그렇다고 말을 하면 김대


리 입장이 난처하잖아. 그러니 그런게 아니지."


"무슨 말이 그래요? "


"왜? 오컴의 면도날을 날려줄까?"


"어디 그 잘난 면도날을 날려봐요."




처음 내가 이 말을 했을 때는 잘 알아 듣지 못하던 부하 직원들도, 어느세 물들었는지 복


잡한 이야기가 나오면 곧 잘 따라하는 오컴의 면도날. 




"그냥, 김대리가 좋아서 주는 녹차라고 생각하고 마셔. "


"푸핫!..좋아하는 여자 이름도 기억못하는 남자가 주는 걸 마시라구요?"


"틀렸어? 그럼 마시지 말던가.. 큭큭"




입에 사례가 걸릴 정도로 웃다가, 다시 종이컵을 입에 물고 있는 그녀의 입가가 어떤 모습


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종이컵 위로 보이는 그녀의 눈가에는 보기 좋은 주름살이 몇개 


지어져 있었다. 김대리는 분명 웃고 있었다.




"이름은 가르쳐 줘야지?" 


"훗. 왜 파일 훑어보지 그러세요?"


"궁금한 건 당사자에게 물어야지. 김대리가 직접 가르쳐 줘. 이제 외울께."


"퍽이나 외우시겠다.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김유진. 앞으론 틀리지 마세요!"


"뭐 김유진! 정말이야?"


"왜요? 아는 사람이랑 이름이 같아요? 아님 어디서 들었어요?"




한참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며 종이컵에 담긴 녹차를 천천히 마셨


다. 몸이 달아오른 김대리는 내 곂에 다가오며 다시 재촉하기 시작했다.




"왜요?"


"후우.. 설마했는데..."


"아니 뭐예요. 사람 궁금하게 만들고.. 어디서 내 이름 들었어요? 예?"




녹차를 다 마실 동안 뜸을 들이다가 휴지통에 빈 종이컵을 던지고 문을 열고 나오며, 그녀


에게 조용히 말을 하고 도망쳤다. 




"아니.. 겨우 한글자 틀린게 억울해서."




탕비실 안에서 뭐라 앙칼지게 소리치는 김대리의 말소리가 들렸지만, 내 귀는 이미 닫혀


진 오래였다. 안들려. 




자리에 앉아 화면보호기로 넘어간 모니터를 바로 잡아주니, 잠시 후 메신져 창이 하나 뜨


기 시작했다. 이 놈의 메신져. 요즘 너무 자주 사용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


전에는 다른 부서와 업무에 관계된 일에만 잠깐 쓰고 그랬는데, 언제부터 내가 메신져 질


을 했다고 자리에 앉자 마자 창이 뜨는 것인지. 




[과장님, 어디 갔다 오셨어요?]




메신져 창의 주인은 윤희씨였다. 이제는 날 감시까지 할려고 하나? 하는 부담스런 생각이 


들었지만, 김대리와 내가 거의 동시에 빠져나간 것을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대충의 정황


을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윤희씨 눈치챈거 다 알아. 나 알면서 물어보는 거 별론데..]


[미안해요. 과장님.]


[됐어. 그걸 탓할려는건 아니니까.]


[죄송해요.]


[사과는 한번이면 충분해. 김대리 만나서 윤희씨 소문 내지 말라고 부탁했어. 어차피 나


야 결혼을 한 입장이니 어떤 소문이 나더라도 간부들이 눈감으면 그만이지만, 윤희씨는 


그게 아니니까. 나 건드리는건 참겠는데.. 윤희씨는 놔두라고 부탁했어. 알아 듣는거 같으


니까 걱정하지 마.]




한참을 아무런 메세지가 뜨지 않고 있었다. 꼭 무슨 말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


가 되면 앞으로 조심해야겠다는 자기 반성의 글이 올라 올 법도 한데. 반응이 없어 파티션 


넘어로 그녀의 자리를 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 머리가 아예 보이지 않았다. 잠


시 잠이라도 자나 하는 생각에 전화기를 들고 장모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산달이 얼마 남


지 않는 마눌이 갔는데, 마눌이 아니라 장모님을 챙겨줘야 할 것 같았다. 잠깐의 신호가 울


린 후 자다가 깬 듯한 마눌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눌?"


"자기, 밥은 먹고 다니는거야?"


"응. 걱정마. 몸은 괜찮지?"


"응, 안보이니 밥을 먹는지 라면만 먹는지 알 수가 없네. "


"걱정마. 마눌 걱정때문에 밥은 꼭 먹어. 아, 그리고 장모님 바꿔줘 "


"엄마 잠시 밖에 나간거 같은데..그래서 내가 받은거야"


"그래? 흐음.."


"왜? 나 맛있는거 먹이라고 엄머한테 부탁할려고? 어련히 알아서 할까봐..큭큭"


"아니, 장모님 목소리가 갑자기 듣고 싶어서.. 장모사랑 나라사랑인데.."


"울 엄마 연하 싫어해. 큭큭"




한동안 마눌과 장난을 치다가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 장모님이 좋아하실 만한 선물 몇


가지를 골라 장모님댁으로 발송했다. 그리고 오늘도 점심을 거르고 녹차 한잔을 타서 잠


을 자고 있는데 또 누군가 잠을 깨웠다. 윤희씨일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면서 고개를 들


어보니 왠걸, 김대리였다. 전혀 뜻밖의 사람이라 한동안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니, 그녀도 당황스러운지 내 얼굴을 쳐다보며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으음. 김대리. 무슨 일이라도?"


"아, 아뇨. 식사 안 하시고 주무시고 계시길래..."


"난.. 몸이 안 좋으면 밥을 안 먹어. 안 먹었으면 식사하고 와요. 늦는 건 걱정하지 말구.."


"그래서 이걸... "




무언가 들어있는 검은 봉투를 급하게 탁자 위에 던져주고 도망가 버리는 김대리가 무척 


수상했다. 원래 저런 인간이 아닌데 갑자기 왜 저러는 것인지. 검은 비닐 봉투에 들어있는 


것은 초코우유 하나와 달걀과 토마토가 들어간 샌드위치였다. 김대리가 안 하던 짓을 다 


하고 수상해. 그래도 애써 가져다 준 건데 안 먹고 버릴 수는 없으니, 탕비실에 가서 빵과 


우유를 먹었다. 미지근한 물을 받아 주머니에 있던 약을 꺼내 먹고 나갈려고 하는데, 숨을 


몰아쉬며 윤희씨가 들어왔다. 




"윤희씨? 무슨 일있어? 왜 그리 힘들어해?"


"아.. 과장님 식사 못 하셨을 거 같아서 뛰어오느라.. 헤헤"




그리고 내미는 종이 봉투 안에 들어있는 죽그릇. 방금 빵이랑 우유 먹어서 그렇게 배가 고


프지 않은데. 더구나 난 아프면 아무 것도 안 먹는 다니까 이 사람들이! 라고 말해주고 싶지


만, 날 걱정하는 마음에 사무실이 있는 곳까지 급하게 온 그녀의 얼굴을 보니 그런 말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예쁜 얼굴 때문에 한번만 더 참는다. 이런 생각으로 웃으며 그녀를 반겨


주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는데.. 윤희씨 정말 고마워."




나 지금 토하기 직전인데..라고 누가 동시통역을 해 줄 사람이 없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오늘도 난 그녀가 떠주는 죽을 다 먹고, 그릇까지 싹싹 긁어주는 알뜰함에 목구멍 끝


까지 죽이 찰랑 찰랑 차는 진기명기를 보이고 말았다. 어제와 다르게 급속히 얼굴이 나빠


지는 내 얼굴. 아..정말 이래서 내가 아플 땐 잘 안먹는다니까. 




"괜찮아. 조금있으면 좋아질거야.."


"미안해요. 제가 억지로 먹여서... 과장님 정말 미안해요..."


"괜찮... 우웁.."




목에서 소화가 된 빵과 죽이 막 올라오는 상황이었지만, 그 상황에서도 탕비실 싱크대에 


토를 하면 뒷처리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 화장실에 뛰어갔다. 점심


을 마치고 양치질을 하고 있는 몇몇의 남자 직원을 밀치고 변기 뚜껑을 잡자 말자 분수쇼


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분수를 만드는 나야 속이 시원하지만, 밖에서 밥 잘 먹고 와서 양치


질 하는 저 녀석들 기분은 과연 어떨까 하는 즐거운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인지. 




눈물이 쏙 빠지는 역류의 고통을 느끼며 변기통을 부여잡고 있다가 겨우 내 자리에 돌아


왔을 때, 안쓰러운 표정과 미안함이 반반씩 섞인 그녀의 얼굴과, 몸이 많이 아픈게 아니냐


고 묻는 몇몇 직원들. 그리고 자신이 준 빵 때문이 아닌가 걱정하는 김대리의 걱정어린 눈


길을 한꺼번에 받을 수가 있었다. 




"아.. 얼굴 표정이 다들 왜 그래. 나 아직 안 죽었다고.. "




그때 내 표정을 살피고 있던 김대리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내게 부재중 메모를 말해주었


다.




"저..과장님."


"응?" 


"과장님 안 계실 때 부장님께서 전화주셨는데요. 연락받으면 바로 오시라고.."


"바로?"


"예." 




그 인간은 또 무슨 이유로 날 불러들이는 건지. 어제 해준 보고가 마음에 안들었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건 결코 아니었다. 늙은이 가지고 노는 건 한두번 해 본 것도 아


니고,그런 것에서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갑자기 오라고 했다면 분명히 뭔가가 있는데. 상


사가 부른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별로 편하지 않았다. 가만히 두는게 가장 좋은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몸을 털어서 잡힐 약점이 없으니 말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잡아떼


고 화내야지.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아픈 배를 잡고 부장실로 향했다. 




땅으로 부자가 됐으면 복덕방이나 열어서 노후를 즐길 것이지, 사장의 친인척이라는 이


유만으로 부장의 직책에 개인실이 따로 있는 인간. 이 인간이 늙어서 할 줄 아는 거라곤 인


터넷으로 고스톱치는 것과 바람피는 것, 그리고 업무시간에 사우나 가서 다음날 나타나는 


것 밖에 없지만, 불행히도 내 직속상관이었다. 그리고 학교 선배였다. 널리고 널린 고등학


교 선배. 그게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지 첫입사 때 내 인사 카드를 보며 그렇게 반가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영감 아니랄까봐. 




노크를 하고 부장실에 들어가니 경쾌한 사운드가 부장실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쓰르륵 쓰르륵 흔들었어요~ 띵똥땡~!!"




볼륨이나 좀 줄이지 내가 다 부끄럽네. 부장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부장님, 선우영입니다."


"아..자넨가? 잠시만 기다리게..."




급하게 오라고 해놓고 고도리나 치고 있다니. 디자인 업무에 관한 것은 제로에 가깝지만, 


돈냄새 맡는 것은 귀신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 사장이 신임을 많이 하는 편이라 이런 모습


을 보는 것도 이젠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한참을 고도리에 빠져 내가 자기 앞에 있는 것


도 잊었던 부장은 마우스를 집어 던지며 패가 아떻게 끝이 났는지 몸으로 보여주었다. 패 


꼴고 나서 업무에 관계된 보고가 있으면 곤란한데, 어떻게 수습하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


는데 부장이 날 지극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보며 말을 했다. 저 표정. 위험해.




"선과장.."


"예, 부장님."


"자.. 이거 받고 가보게. "




그가 책상 넘어로 넘겨주는 것은 법인 카드. 뜬금없이 이걸 넘겨주고 뭘 하라는 것인지. 


이거 가지고 가서 나 차하나 뽑아도 돼요? 이렇게 물을려다가 정확한 용처에 대해 물었다. 


직장생활하며 몸에 베인 것은 언제나 정확한 책임의 범위. 




"저, 이걸 어떻게..?"


"가서 애들 술이나 좀 사주고 놀게 해줘."




회식을 하라는 것 같은데 그러면 당신도 있어야 할 것 아냐. 한두번 빠지는거야 그러려니 


하지만 언제 참석이라도 한 적이있는지. 나도 회식은 귀찮기 마찬가지인데. 책임자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을 수록 좋다는 오랜 직장생활의 경험에 부장을 물고 넘어졌다. 




"부장님도 가셔야죠. 오랜만인데, 애들도 좋아할 겁니다."


"아.. 난 오늘 선약이 있어서.. 그러니 이만 가 보도록.."




그러면서 씨익 웃는 부장의 능글맞은 얼굴. 선약은 무슨 선약. 집에는 회식한다고 해 놓고 


어디서 챙긴 아줌마 궁뎅이나 만지러 갈거면서. 못먹어도 고라는 고스톱의 가르침에 따라 


선배에게 일침을 가히기로 했다.




"전에 분과는 달리 오래가는 걸 보면, 예쁘신가 봅니다."




궁색한 핑게라도 궁리하는지 무언가 할 일을 찾느라 분주한 부장. 저 인간이 부끄러워 할 


때도 있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부장이 한마디를 하고 무언가 


일하는 척을 했다. 




"그 카드는 선과장이 알아서 쓰고 가져오면 돼. 알아서 해."




알아서 쓰라는 말이 더 무서운 법이네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딴에는 챙겨준다고 한 


말인데 초를 칠 필요는 없었다. 일단 받은 카드는 잘 써야 하니까. 몸도 아픈 놈이 부장실


에 까지 끌려가서 기운없이 내려오니 뭔가 크게 당한게 아닌지 걱정스런 표정으로 보는 


부하직원들. 




"재경씨, 잠시 복도 문 좀 닫아주실래요?"




공적인 자리에선 높임말, 사적인 자리에선 나이 대로 말까는게 내 철학이었다. 정말 어쩌


다 보니 나보다 어린 부하직원들만 모인 부서에서 그들이 반발하면 항상 내가 하는 말. 억


울하면 일찍 태어나시던가. 




"과장님, 저 백영주인데요."


"네, 문 좀 닫아주세요."


"에효..."




네들이 이름을 백날을 말해 봐라. 내가 이름을 외우는가. 결혼하면 떠나갈 여직원 이름은 


외우지 않는다고 내가 몇번이나 말을 했는지 아직도 세뇌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


았다. 일단 공지사항을 먼저 말해주고 잠을 좀 자야지. 그래야 새벽까지 달리는 토끼들을 


관리할 수 있으니까.




"오늘 부서 회식이 있으니, 일을 빨리 정리한 후 늘 가던 코스를 밟습니다. 이상 전달 끝! 


일 보세요."




자리에 앉아 일을 정리하고 회식전까지 잠을 청할려고 하는데, 입사한지 얼마 안되는 주


희씨가 내게 무언가 물어왔다.




"저 과장님.."


"예, 주희씨."


"저 희영인데요.. "




뜬금없이 이름 가르쳐 줄려고 물은건가 하는 황당함에 그녀 주변의 김대리와 몇몇 여직


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입 교육을 어떻게 챙긴거야!라는 내 얼굴 표정을 읽었는지 김


대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파티션 넘어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희영씨가 참아. 과장님은 사람 이름을 외우는 능력이 없어. 나도 얼마 전까진 효진이었


어."




김대리의 말에 부서 안이 떠나갈 정도로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지작히 말한 건 


맞는데 다 들리는 거라면 이거 나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닌지 궁금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김


대리와는 말을 섞으면 내가 불리하니까. 




"저 그런데 늘 가던 코스란게 뭔지 궁금해서요.."


"그건 가보면 알건데 별 건 없어. 회식비가 충분하면 밥먹고 룸에 가고, 회식비가 빠듯하


면 고기만 먹는 건데.. 늘 가던 코스라고 하면 룸까지 포함된 말이지. 과장님이 회식비 많


이 못 타내면 그냥 밥먹자고 말하거든. 과장님과 좀 있다 보면 다 알게 돼. 큭큭"




내 욕을 하던 말던 맘대로 하세요. 라는 심정으로 책상을 정리하고 잠자기 좋은 모양을 잡


고 있는데 모니터가 깜빡거리고 있는게 보였다. 이 놈의 메신져. 포트를 다 막아달라고 전


산실에 부탁을 할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저 과장님..]




윤희씨였다. 아..오늘 저녁에 밥먹자고 약속을 했었지. 깜빡했네. 회식도 밥인데 이걸로 


떼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드 주인이 따로 있더라도, 결재하고 긁는 건 


엄연히 내가 아닌가!




[오늘 윤희씨하고 저녁 먹을려고 했는데.. 미안하게 됐어. 부장님이 꼭 오늘 회식을 하라


고 하니 어쩔 수 없네. 오늘 회식하면서 기분 내도록 해.]


[저.. 그럼.. 회식끝나고 말씀드릴게요.]




지금 말하던가 회식 끝나는게 몇 시인데 그때까지 궁금증을 참으라고! 궁금한 마음에 급


하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회식이 언제끝날 줄 알고.. 그리고 그때면 다들 제정신도 아닐건데. 중요한 말이면 지금 


말해요. 맨정신일 때.]


[아니예요. 저 오늘 술 안마시고 회식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씀드릴께요.]


[후우... ]




입으로 내쉬는 한숨과 손으로 적는 텍스트 한숨의 절묘한 조화. 내 글을 보고 느꼈는지, 


여직원들끼리 바보과장 욕한다고 바쁜 와중에 내 한숨 소리를 용캐 들었는지 그녀의 사과


가 메신져에 뜨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과장님. 정말...]


[아냐, 윤희씨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다그친 내가 잘못인걸. 걱정하지 말구. 오늘은 회


식 잘 하구 나중에 따로 윤희씨랑 밥먹을께.]


[고마워요. 과장님. *^^* ]




설마 내가 여직원 헷갈리게 한 건 아니겠지 하는 불안감이 잠시 들었지만, 그녀와 내가 나


이가 몇갠데 설마 이런 것에 흔들릴까 하는 생각에 안심할 수 있었다. 직장생활 5년이 넘


으면 순정 만화를 읽으며 배를 잡고 웃을 수 있는 순수함의 때가 생긴다고 누가 말을 했었


는데. 그러면 내 순수함은 이제 까맣다 못해 보이지도 않겠군. 




"설마 오늘 무슨 일이 생기겠어. 회식때 애들 챙겨주고 집에서 잠이나 자야지. 지금은 미


리 좀 자고.. "




고도리에 캐쉬 잃고 강분하던 부장을 떠올리면 오늘은 내려올 생각이 없을 테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라 조기경보기를 켜놓고 자기로 했다. 메신져로 윤희씨에게 부장이 내려오면 


전화 달라고 한 후 단잠에 빠져들었다. 관리직에게는 회식도 업무의 연장. 그러니 오늘 회


식은 엄연히 야근이야.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멀 스멀 기어가다가 잠과 함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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