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외로움을 잊기 위해 난 겨울을 ... - 3부

본문

 왜 이런 노래만 틀어주는 거야! "




노래는 끝나가고 있었지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재희는 뒤늦게 귀에 들려오는 가사에 화를 내며 라디오를 꺼버렸다.




" 하아~ 바쁘다고 전화도 안해주고... "




재희는 양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켜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 그냥 전화를 해버릴까... "




그녀는 다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책상 위에 -혹시라도 받지 못할까봐 늘 눈에 보이는 곳에- 올려둔 휴대폰의 액정을 보았다.




" 조금만 더 참을까... "




지난밤의 통화를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목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인지 유난히 전화가 하고 싶었지만 일하는데 방해라도 될까 걱정이 되어 아침부터 계속 참고 있었던 것이다.




" 앗! "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던 재희는 문득 자신이 또 손톱을 물어 뜯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어쩌지? "




그녀의 엄지 손톱은 한참 동안 그렇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보기 싫은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 자신의 손톱을 발견한 재희는 진호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또 한바탕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 지난번에 마지막이라고 약속했었는데... "




일부러 시간을 맞추기라도 했는지 재희가 손톱을 들여다보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휴대폰의 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휴대폰 액정에는 전화 건 사람의 이름 대신에 "재희야 사랑해~"라는 -물론 재희가 진호의 이름 대신 입력해 놓은- 문구와 전화번호가 표시되고 있었다. 재희는 진호에게서 전화가 올 때 마다 그가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느낌에 행복해 하곤 받곤 했지만 적어도 지금 이순간에는 그의 전화가 기쁘지만은 않았다.




[ 여...여보세요... 오빠? ]




오전내내 기다리던 사람의 전화인지라 받을 수 밖에 없었지만 재희는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말을 더듬었다.




[ 어, 미안하다. 이제서야 회의가 끝나고 조금 시간이 생겼어. 근데 무슨 일 있니? ]




[ 아니야~ 일은 무슨... ]


" 바보 같이... "




재희는 누가 들어도 이상하다고 생각할만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버린 자신에게 화가 났지만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 무슨 일이야? ]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진호의 음성은 그에게만은 절대 거짓말을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나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게 된다고 그랬던가? 사실대로 얘기하면 그냥 넘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그녀가 진호를 속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 오빠 전화를 너무 오래 기다렸더니 반가워서 그랬지. 근데 오늘 많이 바쁜가봐? ]




[ ...... ]




재희의 대답이 이상했는지 진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잠시 동안의 침묵은 재희를 긴장하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 ...오늘은 유난히 바쁜 것 같다. 이제 금방 또 회의에 들어가야 하거든? ]




[ ...... ]




[ 대신 저녁때 맛있는거 사줄께. ]




[ 피이... 좋아. 하지만 근사한 데서 사줘야 해! ]




[ 그래 알았다. 퇴근이 좀 늦어질 것 같으니까 8시에 거기서 만나자. ]




[ 응! ]




진호가 말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는 재희는 특유의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 걱정하고 있던 것은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후였다.




[ 그럼 이따가 보자. 끊을께~ ]








" 언제 왔어? "




진호는 급하게 뛰어 왔는지 재희의 맞은편에 앉아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 조금 전에. "




재희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 차라도 한잔 마시고 있지. "




" 오빠 오면 같이 마시려고 기다렸어. "




진호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꼬집는 시늉을 했다.




" 아아~ 아퍼~ "




" 엄살부리는 것도 이쁘다. "




" 헤헤~ "




" 배고프지? 지금 밥 먹으러 갈까? "




재희는 진호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 조금 전에는 많이 고팠는데 지금은 생각이 없어졌어. 오빠는? "




" 으음... 조금 배가 고픈데 못 참을 정도는 아니고. "




" 여기 샌드위치 맛있잖아? 그거 먹으면 안돼? "




" 근사한 데서 사달라고 해서 예약까지 해놨더니 샌드위치를 먹자고? "




" 난 아무거나 오빠랑만 먹으면 다 맛있어. "








진호는 평소와 달리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재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딱히 어디가 이상하다고 집어낼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던 것이다.




" 뭔가 이상한데... "




" 왜... 그렇게 쳐다봐? "




사실 재희는 아까 전화를 기다리며 물어 뜯은 손톱이 마음에 걸려 편하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외출 준비를 하다가 까맣게 잊고 있던 손톱의 상처를 떠올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예 손톱을 깎아 버리고 말았었다. 그렇게 해놓고 보니 짧게 자른 손톱이 너무 어색했다. 이런 저런 색깔의 매니큐어를 발라도 보았지만 문제는 다른 손톱들과 길이가 다르다는데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인조손톱을 붙이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손톱에 신경을 쓰느라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다.




" 너... "




재희는 진호의 목소리에서 뭔가 불안한 기분을 느꼈는지 막 입으로 가져가던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양손을 슬그머니 테이블 밑으로 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테이블 위에 놓인 접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자신을 향한 진호의 시선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 오빠가 제일 싫어하는게 뭐라고 했지? "




" ...... "




재희는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더 숨길 수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거...짓말... 하는거... "




그녀는 마지 못해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 손 내밀어봐. "




재희는 테이블에 가려 보이지 않는데도 손톱을 숨기려고 하는 것처럼 주먹을 꼭 쥐었다. 그녀의 말대로 진호는 거짓말-특히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고 하는- 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잘못을 감추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은 반드시 언젠가 다른 사람을 힘들고 아프게 한다는 것이 평소 진호의 생각이었다.




" 어서. "




어쩔 줄 몰라하며 머리 속으로 수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던 재희의 귀에 진호의 재촉하는 말이 들려왔다. 게다가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그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재희는 잔뜩 움츠린 채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진호는 그제서야 그녀의 손톱이 가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봐. "




" 오...오빠 그게 사실은 "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고개를 들어 진호를 보던 재희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다음 말을 잊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진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거짓말이라면 재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그의 이런 눈빛이었다. 그녀의 마음속까지 꿰뚫어보는 듯한, 아주 작은 감정의 조각조차 담지 않은 그의 눈빛을 보고 있으면 심장이 멈추는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차한 변명-또 다른 거짓말을 낳을지도 모르는-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재희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몇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아까... 오빠 전화를... 기다리다가... 손톱을... "




" 그래서 그걸 숨기려고 가짜 손톱까지 붙인거야? "




" 잘...못했어... 정말... 나도 모르게... 숨기려고 한게 아니라... 오빠가 화낼까봐 무서워서 그만... "




" 내가 두번째로 싫어하는게 뭐지? "




재희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오후에 일어난 작은 사건이 없었던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순전히 자신의 잘못이었지만 왠지 진호가 원망스러워지는 그녀였다.




" 약속 어기는거... "




" 처음에 재희한테 부탁한건 뭐였지? "




가끔 재희가 잘못한 일이 있을때면 늘 이런 식의 대화가-재희에게는 대화라고 생각되지 않았지만- 이루어지곤 했다. 진호가 질문하고 재희가 대답하는 식의 대화, 물론 그 질문이 재희에게 생각해 볼 여지를 주는 것은 아니었다. 물어보고 답변하는 그런 대화가 아니라 이미 서로 잘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한번의 질문과 한번의 대답이 이루어질 때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그것이 잘못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는 것이었다.




" 거짓말... 하지말고... 약속 지키라고... "




진호의 허락 없이 움직이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재희의 양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주위에만 공기가 사라져 버리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며 힘들게 숨을 쉬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 탁자위로 한방울의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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