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외로움을 잊기 위해 난 겨울을 ... - 2부

본문

소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당연히 믿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재희마저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종류의 소설과-소정의 표현을 빌리자면- 같은 내용이었다. 재희는 소정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내내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 고통과 수치심... 사람들이 말하는 성적인... 이런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노리개가 되어버린 비참함... 참을 수 있었어. 고통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 사람들은 날 죽일 생각이 없었으니까... 온몸에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쓸데없는 것이었거든... "




" ...... "




" 처음에는 무섭다는 생각 뿐이었어. 특히 그 여자의 발소리만 들려도 몸이 떨려왔거든... 그런데... "




재희는 말을 멈추고 잠시 감정을 조절하려는 듯 심호흡을 하는 소정을 보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 하아... 그런데...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내 육체였어... "




" 그게 무슨...? "




"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매질을 당하면서... 이 쓰레기만도 못한 몸이 흥분하고 있었어... 민우의 부드러운 손길이 몸을 스칠 때 조금씩 느꼈던... 아니 그것보다도 더 확실하고 강한 쾌...감이 아래쪽에서부터 내 몸을... 휘감아 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 "




침대에 걸쳐 앉아 있던 재희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있는 소정의 손을 끌어다 한데 모으고 자신의 양 손으로 살며시 감싸쥐었다.




" 밤이면 똑바로 눕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도 다음날 당하게 될 고통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어떤 기분인지... 언니는 모르겠지? "




재희는 소정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여기서 소정의 이야기를 끊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 정말로 두려웠던건 그거였어. 민우를 다시 만나도... 고통에 길들여진 내가 그 생활을... 그리워 할까봐... 악마 같은 그 남자의 손길을... 수많은 남자들의... 흑흑흑... 내... 내 영혼까지... 물들어 버리기 전에... 용서할 수 없는 쾌락에... 흑흑... "




소정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재희의 품으로 안겨왔다.




" 이런... 흑흑... 몸으로 어떻게 민우를 만날 수 있겠어... 흐윽... "




" 이제 그만 해... "




재희는 소정의 몸을 힘주어 끌어안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가 자신이 눈물을 흘리며 자책하고 괴로워할 때 금방 모든 것을 잊고 웃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짧지만 나직한 한마디와 같은 힘을 가졌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녀가 알건 모르건 -모르는 것이 확실했다- 소정은 재희의 한마디 말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 어떤 기분이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다 이해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라면... 이해할 수 있어. "




" 언니라면? "




재희의 말이 묘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소정은 흐느낌을 멈추며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 소정이는 정말 바보야... "




재희는 눈물로 범벅이 된 소정의 얼굴을 닦아주며 말했다.




" 자살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야.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두고... 그것이 남아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




재희는 그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아련히 떠오르는 옛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그래도 넌 아직 만날 수 있잖아... 아직은... 살아... 있으니까... "








" 나가자! "




" 응? 어딜가는데? "




" 답답하다며? 바람이라도 쐬러가자고. "




" 정말? 어디로? "




" 글쎄... 가고 싶은데 있어? "




" 음... "




재희는 엄지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물며 어디로 갈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길때면 무의식 중에 나오는 그녀의 오래된 버릇중의 하나였다.




" 또! "




" 헤헤~ "




진호의 짧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는 재희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 물고 있던 엄지 손톱을 얼른 빼내며 천진스럽게 웃어 보였다.




" 안할려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




" 또 그러면 집에 보낸다. "




" 치이~ 정말 모르고 그랬다니까~ "




진호는 재희의 이런 얼굴을 보면 도저히 화를 낼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 정말... "




" 알았어. 알았다구. 조심할께. "




재희는 진호의 표정이 조금 굳어지는 것을 보며 금새 태도를 바꾸어 말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 남자가 어떤 성격인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재희였다. 끊임없이 그녀의 나쁜 버릇을 찾아내고 고쳐주려 애쓰는 진호의 성격 때문에 처음에는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지만 그가 재희를 자신의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재희는 순수하게 그녀가 조금 더 완벽한-다른 사람에게 흠 잡힐 곳이 없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진호의 마음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재희가 유일하게 진호에게만 순종적인 자세를 보이는 이유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입이야? 아니면 손이야? "




" 응? "




" 어디가 잘못 한거냐고. "




" 그... 그건 왜? "




재희는 진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수없이 많았지만 진호의 이런 질문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 모...몰라! "




" 대답해. "




진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재희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재희는 그의 이런 음성에는 꼼짝도 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리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생각해 볼 뿐이었다.




" 어... 손... 아니... 입인가... "




" 눈 감아. "




재희는 눈을 감으라는 진호의 말에 자신의 몸이 평소와 다르게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계속 그의 시선을 마주보고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는 재희는 눈을 꼭 감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양손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진호에게 보여주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잘못했으니까 벌을 줄꺼야. "




재희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진호가 어떤 행동을 하려는지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잠시 그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긴장하고 있던 재희는 깜짝 놀라 눈을 뜨고 명하니 진호를 바라보았다.




" 오빠... "




재희가 눈을 떴을 때 진호는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이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후였다.




" ...... "




재희는 빨개진 얼굴로 한쪽 손을 자신의 입술에 대고 조금 전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기분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진호의 이런 장난스러운 행동이 첫키스라는 달콤한 단어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 많이 생각했었다. "




첫키스의 느낌에서 -지금까지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말이 진호를 당황하게 만들었었다-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재희는 그녀의 입술을 훔쳐간 진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으며 머리속이 새하얗게 탈색이라도 되어 버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조금 유치한 대답... 아니 행동이겠지만... "




" 오빠... "




재희는 진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늘 그녀를 아주 친한 동생으로서만 대해오던 진호였다. 간혹 장난스럽게 그의 마음을 떠보는 재희의 질문을 어리광을 받아주듯이 흘려 넘기곤 했던 진호였기에 오늘 그의 말과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분명한 것이었다.




" 사랑해. "




" 정말이야? 지금 그 말 진심이지? "




지금까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진호를 얼마나 원망했던 재희였던가. 그는 유치하다고 말했지만 세상의 어떤 말도 이보다 더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재희는 이런 상황에서 왜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어느덧 눈에 가득 고여있던 눈물이 뽀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왜 눈물이 나지? 그냥 이렇게 앉아 있어도 되는건가? 달려가서 안겨야 하는건 아닌가? "




순간 재희의 머리 속에는 수만가지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늘 하고싶은 대로 행동하고 감정이 시키는 대로 이끌려 왔던 그녀에게 이런 경험은 생소한 것이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있던 진호의 입가에 자상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리고 환한 미소가 걸리는 것을 확인한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 고마워... 오빠... 정말 고마워... "




"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지? 미안하다... "




진호는 재희의 가녀린 몸을 힘주어 끌어 안으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재희는 갑자기 진호의 몸을 밀쳐내며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눈물에 젖어 더 아름다운 빛을 보이고 있는 그녀의 두 눈은 진호의 눈을 똑바로 향해 있었다.




" 나 이제부터 오빠 미워할꺼야. 그동안...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너무... 힘들었단 말야... "




진호는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겨 이마에 짧은 키스를 하고 다시 한번 그녀를 안아주었다. 힘을 주어 안지는 않았지만 맞닿은 그녀와 자신의 육체 사이에서 서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득 담은 영혼이 통할 수 있을 만큼 따뜻한 포옹이었다.








" 꿈이 아닐까 생각했어... 혹시라도 꿈에서 깰까봐 오빠 옷자락을 있는 힘껏 잡고... 놓으면 깨어버릴 것 같았거든... 깨어나서 다시 혼자가 되는건... 너무 무서울 것 같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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