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친구 - 단편

본문

※ 성적표현 없이도 야설이 될수 있을까? 실험적인 글임다 !!!




내가 그 사람을 유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대학동기로 만난 우리는 질투를 느낄 정도로 가깝게 지냈지만 항상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두고 있었다. 구김살 없이 밝은 모습으로 일할 때는 조금 모자라지 않나 싶기도 했지만 어떤 문제를 발견하면 엄숙해지며 원인파악과 해결의 집요함을 보일 때면 역시 남자는 다르구나 싶어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씩 싹트게 된 것 같다.




미인 축에는 들지 못했지만 코가 오똑하고 얼굴 윤곽이 뚜렷한 덕분에 남의 눈에 잘 띄는 편인데다 가슴이 유난히 커서 브레지어로 꼭꼭 묶어 두지 않으면 조금은 헤퍼 보일 것 같은 외모를 가진 나를 그 사람이 탐내지 않는 것을 보고 어쩌면 그 사람의 내면 속에 열등의식을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다. 가끔씩 "가슴이 큰 여자는 머리가 나쁘다는데" 라며 놀리는 그 사람에게 All A+를 받은 성적증명서를 떼다 얼굴에 던져주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콤플렉스는 나에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깝지만 멀리 있는 그 사람에게 보란 듯이 야간 대학원에 진학했고 전체 수석까지 먹는 것을 자랑했다. 그런 나를 노력을 인정했는지 직장에서도 다른 동기들 보다 좋은 자리에 앉히고 승진도 빨리 시켜줬다.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좋은 직원이라며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리만 듣고 산다고 그 사람에게 자랑했지만 그 사람은 어떤 촌평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키만 멍뚱하게 커서 싱겁게 보일 뿐 다른 사람과 차별화 될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가끔 모임이 있는 날 내가 끌어 당기는대로 어디론가 정처 없이 따라 걷다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올 뿐인데도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오히려 내 모습이 초라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 예뻐?"


"응."


"나랑 사귀는거 맞아?"


"응."




명동에서 남산길을 따라 장충단 공원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산책로를 걸었지만 결국 팔짱을 껴도 내가 껴야 못이기는 척 해줄 뿐이다. 한번만이라도 먼저 입맛춤 해오거나 허리를 안아주기만 해도 내 모든 인생을 걸 수 있을텐데 그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 했지만 결코 더 가까워질 가능성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사람에게 목매달고 사는 듯한 모습으로 비처졌는지 미팅을 주선하거나 개별적으로 멋지다 싶은 남자를 소개시켜주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먼 발치에 있는 그 사람에 대한 미련 때문에 어떤 누구도 마음의 문을 열 수 없었다.




하루는 몸을 못 이길 정도로 술을 퍼 먹고 그 사람에게 물었다. 


"너랑 나랑은 뭐니?"


"친구."


"애인 아냐?"


"좋은 친구."




술 집에서 앉아 있을 때는 몰랐지만 찬 바람이 얼굴을 때릴 때는 미쳐버릴 것 같은 고독이 밀려왔다. 다정한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허전한 마음으로 휘청거려야 하는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싶어 깊은 절망감에 빠져 들었다.




"나, 너 좋아하는거 말해도 돼?"


"알아. 나도 널 좋아하니까."


"그딴 거 말고 널 사랑한다고 말해도 되냐고."


"지금이 좋지 않니? 부담 없이 마음을 활짝 열어 줄 수 있는 친구로 말야."




포기해야만 할 것 같다. 


차가워진 얼굴을 두 손으로 문지르며 한 참을 걸었다.


조금 기울어 두 어깨가 맞 닫지만 말 없이 걸었을 뿐이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듯 하더니 어느새 얼굴을 타고 흘렀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며 이를 악물고 참았다.




낙엽이 떨어졌다. 난 그 위를 밟고 있다.


하얀 눈이 내렸다.


성당을 중심으로 크리스마스 캐럴 송이 울려 퍼졌다.


거리마다 하얀 눈 속의 축제를 위해 사람들이 넘실대기 시작했다.


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오늘 시간있어?"


"응, 시간 넘쳐난다."


"이따 차 한잔할래?"


"좋지. 썰렁한 크리스마스 될뻔했네."




명동거리를 걸었다.


한 치도 내 몸에 가까이 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한 손으로 팔짱을 끼고 또 한손으로 그 손을 잡았다. 자연스럽게 몸이 기대어지고 얼굴을 팔 위에 묻을 수 있었다. 바람이 점차 강해지며 하얀 눈은 어느새 거친 눈보라로 변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세찬 눈보라를 피해 어디론가 하나 둘 자취를 감췄지만 나는 더 넓어진 거리를 맘껏 활보하게 된 기쁨이 더 컸다. 




"배고프지 않니?"


"응, 배고파."




모처럼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었다.


몇일만 더 있으면 또 한 살을 먹게 되니까 철이라도 들었나 싶어 대견스러웠다.


"뭘 먹을래?"


"함박스택."




눈보라도 피할 겸 레스토랑은 초 만원이라 발 딪을 틈도 없는 북세통 이라 호텔 레스토랑을 택했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술 집에 가서 안주로 때우는거 어때?"


"분위기도 좋은 날 구석진데 쳐박혀서 좋을게 없잖아?"


"너도 분위기 알아?"




그 사람이 분위기 운운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어떤 상황에서도 두리 뭉실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싱겁다느니 줏대도 없다느니 하는 항간의 소리도 의식 못하고 사는 쑥맥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번도 자기 목소리를 드러낸 적이 없는 사람이기에 주위 사람들은 장래성이 없다고 하지만 온통 그 사람에게만 끌려 있는 내마음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길 건너 저쪽 지하에 있는 디스코택에 갈까?"


"응, 좋아."




그 사람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할까봐 팔짱을 낀 채 서둘러 디스코택에 들어갔다. 내가 제일 싫어 하는 담배연기가 실내에 가득하여 역겨운 냄새로 훌러덩 넘어질 뻔 했지만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수 있는 이 날의 행사조차 날아갈까 두려워 호흡을 조절해가며 그 곳의 분위기에 익숙해지려는 노력해야만 했다. 코는 예민한 듯 하면서도 무딘 면이 있어 한참 지난 후에는 아무런 냄새도 느낄 수 없었다. 기본 안주를 시켜놓고 무대위에 나간 두 사람은 고고와 부르스를 가리지 않고 서로를 가슴에 가득 안아 들였다. 학교 다닐 때 배운 어설픈 탭댄스 실력으로 나무토막 같이 서 있기만 하던 그 사람을 리드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분위기에 맞추려는 노력을 보곤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춤도 못추니?"


"응, 쓸데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럼, 너한테 가치 있는 일은 뭐야?"


"아직 결정된게 없어."




무슨 남자가 부르스는커녕 막춤도 어설프기만 했다.


친구 말처럼 이 사람에게 끌리는 내 감정은 너무 어설퍼 보이는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모성본능일 뿐인지도 모른다.




"나 말고 여자친구는 있니?"


"없어. 친구는 너 뿐이야."


"넌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는거야? 아님 피하는거니?"


"니 생각은 어때?"


"모르겠어. 넌 매력 투성인데 딴 애들은 널 싫어 하더라."


"그럼 된거야. 다른 여자 애들로부터 관심 받는거 싫거든."


"니 진심이 뭔데?"


"무관심."


"날 믿고 그러는 것 아냐?"


"맞아. 내 곁엔 항상 네가 있잖아."


"나, 결혼할 나이라는거 알아?"


"벌써? 그럼 어서해."


"누구랑?"


"네가 결정할 일이지."


"내가 딴 남자랑 결혼해도 된다는거니?"


"우린 친구일 뿐이잖아."


"친구, 친구, 지겹지도 않아?"


"친구 싫어? 그럼 뭘 하지?"


"내가 좋아할 말을 찾아서 들려줘."


"음~, 모르겠는걸."




답답한 디스코텍을 나왔다.


밖은 어둠 속에서도 새차게 퍼 붓는 눈보라로 하얗기만 하다.


길가의 캐롤송도 잦아들며 옷깃을 여민 사람들이 힘겹게 바람에 맞서 걸을 뿐이다.


수북히 밟히는 눈 길속에서 새로운 발자국을 만들며 한참을 걸었다.


거리를 오가는 차량들은 무거운 체인을 감고도 휘청거리며 거북이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야, 이러다 집에 가긴 글렀는걸."




그 사람의 푸념 섞인 말이 귀에 꽂히는 순간 가슴이 마구 울렁거렸다.


눈보라 때문에 차가 끊어졌다는 확실한 명분 앞에서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 이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하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은 쏟아지는 눈 발에 금방 덮혀버려 자취도 없다. 




"추워. 어디 좀 들어가."


"추워? 그럼 내 코트 줄게."




내가 원하는 것은 안락하지는 않더라도 구둘장에 불이 들어와 온기가 살아있고 남의 시선도 피할 수 있는 차단된 공간이었지만 그 사람은 자신의 코트를 벗어 내 어깨 위에 걸쳐준다.




"자긴 어떻하고?"


"자기? 내가 자기야?"


"응, 자기."


"친구. 영원한 친구."




"지겨워. 제발 친구란 소리 좀 집어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벌써 몇 년째 실랑이를 하면서도 풀지 못한 친구소리가 지겨웠다.


처음 만난 날 키스를 했느니, 잤느니 하는 성만능 시대에 살면서 아직까지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다. 겨우 팔을 내밀어야 못이기는 척 팔짱을 껴 줄 뿐인 관계를 얼마나 더 지속시켜야 될지 가슴이 답답했다.




"너, 혹시 여자친구 있는거 아냐?"


"없다니까."


"날 피하는 이유가 뭐야?"


"과분해서."


"눈 높이 낮췄어. 너만 좋다면 결혼하고 싶단말야."




성질이 머리 끝까지 치밀은 탓에 아무 준비 없이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던졌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대꾸없이 듣기만 하다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봤다.


찬바람에 노출된 얼굴은 빨갛다 못해 파랗게 변했을 텐데 빤히 들여다 보는 그 사람의 눈 빛이 잔잔하게 나를 삼키고 있었다. 숨이 할닥였다. 눈과 눈이 마주치며 얼굴이 커다랗게 크로즈업되고 코와 코가 닿았다. 몇 년을 함께 하면서 처음 맞다은 살결이라서 그런지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두툼한 입술로 내 입술을 덮어버렸으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입술을 뽀족하게 내밀었지만 얼굴을 들어 버렸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민망해진 내 입술은 원상태로 돌아왔지만 기쁨에 뛰던 가슴은 미움으로 변해 버렸다.




"너 정말 이럴꺼야?"


"뭐가?"


"내 입술에 키스하려고 했잖아."


"아, 그거? 하면 난리칠 것 같아서."


"하란 말야. 뭘 망설이는거야?"


"됐어. 멍석깔면 더 못하는 내 성격 몰라?"




인간이 언제 철 들지 걱정이 앞섰다. 밥상 차려줘도 못 먹는 바보 멍텅구리라고 들리지 않는 욕을 퍼 부었지만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밤이 새도록 같이 있어봤자 따뜻한 구들장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차라리 눈 길을 혼자 걷고 싶었다. 




"나 갈꺼야."


"어떻게 가려고?"


"그럼 뭐 하자고. 밤새도록 추운데 걷기만 하자고?"


"알았어. 방법이 있다."




그 사람은 파출소로 뛰어 들어갔다. 난로가 환한 불을 토해내고 있었다. 몇시간을 헤메던 추위가 녹아 내렸다. 더운 공기를 만나니 오히려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한참을 실랑이하던 경찰은 차 키를 꺼내들고 밖으로 나갔다. 조심스럽게 눈 덮힌 도로를 달리는 경찰차 안에서 그 사람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심장 소리가 귀기울인 내 몸에 파고 들었다. 눈 때문이기도 했지만 여기저기 미끄러저 나 뒹구는 차량들 때문에 한참을 달려간 것 같았다.




"내려."


"벌써 다 왔어?"


"아저씨, 감사합니다."




경찰차에서 내리며 그 사람은 꾸벅 인사를 했다.


경찰은 신경질적으로 인사를 받으며 어렵게 차를 돌려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서 집에 올라가봐."




그 사람은 내 어깨 위에 입혀진 코트를 건네 입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향해 걸었다. 




십여년이 흘렀다. 


그 날 이후 그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멋진 남자를 만나 오손도손 아이들을 기르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기도 바빳으므로 그 사람을 생각도 해 본적이 없다.




하얀 눈이 내린다.


보고싶다.


그 사람은 그날 어떻게 됐을까?


무심한 사람이지만 나처럼 행복을 찾았을까?


같은 하늘 아래 살아 있는지 알고 싶다.


인터넷으로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동명이인이 수 천명 튀어나왔다.


그 사람이 살았었음 직한 동네를 중심으로 짬이 날 때 마다 한명씩 전화를 걸어봤다.


주민등록번호라도 적어 놨더라면 좋았을 텐데 싶었다.


그렇게 동명이인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한 것이 오년이 넘었던 어느날 반가운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내 목소리 기억해?"


"어, 반갑다."


"너 결혼했니?"


"응, 너는?"


"난 애가 둘씩이나 딸렸어."


"그래? 신랑도 멋지고?"


"그럼. 너무 잘해줘."




몇 년을 찾아 헤멨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습관처럼 그 사람과 같은 이름을 가진 모든 이에게 전화를 걸었던 긴긴 날의 고통이 물에 씻긴 듯 날아갔을 뿐이다. 반가운 마음에 시내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약속의 날까지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걱정됐다.




"어서와."




약속장소에서 그 사람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곤 눈꼽 만큼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의 예전 그 모습이었다.




"보고 싶지도 않았니?"


"친구들 통해 니 얘긴 가끔 듣고 있었어."


"뭐야? 그런데 내겐 전화 한번 안했던거야?"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산다고 들었는데 내가 따로 연락할 일이 있었겠니?"


"그날 헤어진 이후 벌써 십년이 넘은 것 알아?"


"벌써 그렇게 됐나?"


"어휴, 친구라며 소식 좀 알고 살자."


"알았어. 담엔 전화할게."


"요즘 뭐 하며 사니?"


"작은 무역회사 차려서 먹고살아."


"애들은?"


"나도 둘이야."


"널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던 거야?"


"짚신도 짝이 있다잖아. 그럭저럭 괜찮은 여자야."


"내가 결혼하자고 할 땐 들은 척도 않더니 대단한 여잔가 보구나?"


"글세, 제 눈이 안경이라잖아."




오랫만에 만난 너무 많은 얘기들을 나누는 사이에 벌써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오늘은 남편이 지방출장을 떠나고 아이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겼기 때문에 모처럼 자유로운 날이었다. 그 사람만 괜찮다면 밤새도록 못다한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잘 못하는 술이지만 그런 이유로 술술 목줄기를 타고 잘도 넘어간다. 술집에서 문 닫아야할 시간이 됐다며 쫒아낼 듯 몰아세우지만 않았어도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앉아 있었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는 내가 취한 것을 느끼지 못했었지만 걸음을 옮기는 순간 휘청하며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어어, 많이 취했구나?"




그 사람이 처음으로 쓰러질 듯한 나를 바쳐준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동이 밀려왔다. 십여년 전에 단 한번만이라도 나를 안아줬다면 내 모든 것을 아낌 없이 줬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함께 섞여 있었다.




"집이 어디니? 택시 잡아줄게."


"잠깐만 한가지만 묻자, 너랑 나랑은 뭐니?"


"친구."


"아직도 친구?"


"그래 아주 오랜 친구."


"친구소리 듣기 싫어. 이제 부턴 내가 정할 꺼야."


"뭘 정한다는 거야?"


"지금 이 순간부터 애인이라고 불러."




내 혀가 꼬부라졌는지는 몰라도 그 사람의 얼굴이 더욱 붉어지며 난처해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애인사이니까 팔짱을 껴 보라며 팔을 쑥 내밀었다. 그 사람은 그런 내 팔을 감으며 처음으로 팔짱을 껴 들어왔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너무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 일들이 단숨에 이루어 지는 것이 꿈만 같았다. 날이 바뀌면 언제 본적이 있었던가 싶게 되돌아 갈지언정 지금 이 순간만은 오랫동안 지속됐으면 좋겠다.




"애인 사이니까 조금만 더 걷자."




그 사람은 그런 나를 위해 한 참을 더 걸어줬다. 밤이 깊어갔다. 미루어 왔던 어떤 말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내야 할지 안타까웠다.




"내게 할 말 있는거니?"


"응."


"뭔데? 말해봐."


"네 품에 한번 안겼으면 좋겠어."


"........"


"나 오늘 휴가 받았거든. 너랑 함께 하려고."


"........"


"책임 지라는 것은 아냐. 부부사이엔 문제 없거든."


"........"


"널 잊을 수 없었어. 적어도 내겐 특별했으니까."


"........"


"좋아, 한번만 안아주면 되는거지?"


"응, 아주 따뜻하고 포근하게."




그 사람은 가볍게 포옹하며 품 안으로 내가 파고들 수 있도록 가슴을 열어줬다.


설음이 복바쳐 올랐다. 따뜻한 품안에서 온갖 상념이 눈물되어 흘러 내렸다.




"그 때, 니가 날 받아 줬다면 어땠을까?"


"글세, 평범하게 살아가는 부부가 됐겠지."


"나를 보면 감정이 울컥거리지 않니?"


"너무 울컥거려서 널 지킬 용기가 나지 않았었지."


"지금도?"


"니가 남의 여자가 됐으니 그 사람이 널 지켜주겠지."


"이처럼 무뚝뚝한 너를 향해 내 마음은 갈망했을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때문일꺼야."




나는 그의 품에 안기며 얻어진 안식으로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 손을 뻗어 그의 사타구니 쪽으로 향했다. 불끈 솟아 오른 그의 물건이 잡혔다. 양복 바지위로 만져지는 물건을 살짝 쥐어봤다. 커다란 오이를 연상시키는 물건에 대한 갈망으로 지난 날 그를 못 잊어 했던 것은 아닐까 싶어 얼굴이 붉혀졌다. 그의 손이 가슴에 닿았다. 살짝 풀린 브라우스 사이로 기어들 듯 손가락이 파고 들었다. 뽀얀 가슴살에 그의 손이 꼬물거렸다. 바짝 타오른 목덜미의 통증을 느끼는 순간 아래로 빠져나가는 뜨거운 물줄기를 느꼈다. 




어쩌면 그의 행동이 옳았는지도 모른다.


낯선 사람으로 남아 오랫동안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가 염원하는 그 일들에 대한 절제를 통해 더욱 친밀하게 내면 세계를 성숙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실천해 줬는지도 모른다.


여자인 내가 그토록 갈망하면서도 이루지 못한 그 일을 참아낸 그 사람은 이 시대에 있어서 진정한 남자들의 용기였음을 느끼게 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물건이 내 손에 의해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는지 가슴살을 파고들던 손을 빼곤 살짝 어깨를 밀어냈다. 조금 어색한 공간 속에서 그는 악수를 청했다. 뜨거운 마음이 순간 사그러들며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자신감에 찬 얼굴. 수도승 같이 겸허한 모습을 발견했다.




"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않아."


"이제야 알것같아. 너도 정말 나를 사랑했었다는 것을."


"육체적으로 얽혀야만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었었지."


"그런 너를 오랫동안 원망했었어. 미안해."


"이젠 친구라고 불러도 되겠니?"


"응, 우린 애인이 아냐. 서로를 아껴주는 부부 이상의 친구였어."




그 일이 있은 후 남편과 그 사람을 인사 시켰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방법이 서로 다를 뿐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은 서로 죽이 맞아 친구였던 나를 빼고도 흠뻑 술이 취할 수 있는 친구 사이가 되어 버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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