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외로움을 잊기 위해 난 겨울을 ... - 9부

본문

한층 추워진 날씨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복장으로 카페로 들어서는 재희의 모습을 발견한 진호는 그냥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늘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고 해도 진호에게 이쁘게 보이고 싶다는 이유로 고집을 부리고 있는 재희였기 때문이다. 재희는 목까지 올라오는 하얀 폴라티에 무릎이 훤히 드러나는 가죽 스커트, 얇은 검은색 스타킹, 그리고 앵클부츠에 흰색 롱코트를 입고 -단추는 하나도 잠그지 않은 채- 있었다.




" 안추워? "




" 쪼오금 춥긴 한데, 괜찮아. "




" 어제 전화하면서 내내 기침하더니 괜찮긴 뭐가 괜찮아? "




" 근데 오늘 평일이잖아. "




재희는 진호가 평일에 그것도 한참 일하고 있을 시간에 자신을 만나자고 한 것이 기쁘지만은 않았다.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는 것도 한가지 이유겠지만 무엇보다도 최근에 느끼고 있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 할말이 있어서. "




" 무...무슨 말인데? "




재희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진호의 목소리에 긴장하여 말했다.




" 일단 차부터 마시자. "




진호는 잠시 전에 종업원이 놓고 간 찻잔을 이리저리 만지기만 할 뿐 마시지는 않고 있었다. 그런 진호의 모습에 재희는 마음속의 불안감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 후우우... "




" 무슨 일인데? "




" 재희야...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




재희는 막 입으로 가져가려던 잔을 든 채 침을 꿀꺽 삼키며 진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만약에... 오빠가... 후우... "




" 만약에 뭐? 왜그러는거야? "




재희는 잔을 다시 내려놓으며 다그치듯 물었다.




" 이번에... 호주 지사로... 갈 것 같아. "




진호는 힘겹게 하고 싶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재희의 얼굴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는지 고개를 숙이고 조금씩 떨림을 더해가는 그녀의 손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무...무슨 장난을... 나 이런 장난 싫어... "




믿기 힘든 진호의 말에 재희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 자...장난 치는거지? 나... 잘못한거 많아서... 그래서 나 혼내주려고 그러는거지? "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는 듯 재희는 양손으로 잔을 감싸 쥐었다.




" 미안하다... 조금만 기다리면... "




" 왜? 왜? 왜 미안해야 되는데? ...같이 가면 되잖아. 그럼 되겠네. "




진호는 재희의 반응에 미처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농담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벌써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재희의 모습을 보면서도 거짓말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 1년만 있으면 졸업하잖아. 그럼... 그때... "




" 싫어! "




재희의 목소리에 카페 안의 사람들이 두 사람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진호는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지르는 재희의 행동에 놀라 급히 일어나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 재희야... "




" 1년? 1년이라고? 나... 난 지금 내년 3월을 기다리면서 매일... 매일 잠을 설쳐... 3월이면... 3월이면 오빠와 늘 함께 할 수 있으니까... 그... 그런데... 1년이라고? "




" 재희야 제발... "




재희는 진호의 손을 뿌리치며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그의 눈을 쏘아보았다.




" 우리 결혼은? 나...난 어떻게 하라고! 오빠 목소리 듣고... 오빠 얼굴 보는 것만 기다리는 난? 난! 어떻게 하라고! 약속은 지켜야 하는거잖아... 우리 곧 결혼하기로 약속 했잖아... 왜 오빠는 약속 안지키는건데? 응? "




진호의 얼굴에서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을 받은 재희는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 있는다면 진호가 미워질 것 같은 생각 때문이었다.




" 재희야! "




재희는 진호가 다급히 부르는데도 애써 무시하며 카페 밖으로 달려나갔다. 재희가 카페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내리기 시작한 마지막 가을비는 그녀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만들고 있었다.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비록 바보 같은 행동일지라도 진호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싶었던 재희는 그가 찾지 못할 곳으로 숨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 재희야! "




뒤에서 진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희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대로 차도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차도에 뛰어들기 전에 잠깐 멈춰 섰던 재희는 차가 별로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걸음을 내딛었다. 재희가 길을 거의 건너갔을 무렵 빗속에서 나타난 사람의 모습에 놀란 트럭 한대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속도를 줄였다.




" 죽고 싶어!? "




재희는 미안한 마음에 트럭 운전사를 돌아보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진호는 재희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지금은 너무 위험한 상황이었다. 비까지 내리고 거리엔 차가 별로 없는 상태였다. 막 차도로 뛰어들어 재희를 따라가려던 진호는 트럭 한대가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멈추어 서는 것을 발견했다. 그와 동시에 트럭 오른쪽으로 막 승용차 한대가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진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재희의 모습을 찾았다. 그녀는 트럭운전석을 쳐다보며 계속 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달려오던 차들이 급정거를 하며 내는 시끄러운 소리들이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진호에게는 멈추거나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방금 전 트럭 옆으로 숨어든 -그의 시야로부터- 승용차가 재희에게 너무나 큰 위험이 되고 있다는 생각 뿐이었다.




" 위험해! "




재희는 굉장히 급박하게 들리는 진호의 목소리에 앞을 향하던 고개를 다시 뒤쪽으로 돌렸다. 진호는 이미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까지 와 있었다.




" 제발 한발자국만 더... "




승용차 운전수가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차를 멈추려 했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차는 달려오던 속도를 미처 줄이지 못한 채 빗물에 미끄러지며 재희의 몸을 덮쳐가고 있었다. 진호는 앞으로 넘어지듯 몸을 던지며 양 팔을 쭉 뻗어 그대로 재희의 몸을 밀쳐냈다.




재희의 눈에는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진호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양팔을 앞으로 뻗은 채 중심을 잃고 쓰러지면서도 고개를 들어 안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 오빠아아아아! "




다음 순간 진호의 몸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재희는 절규하듯 비명처럼 진호를 부르며 고개를 돌려 그의 모습을 찾았다. 심장이 폭발할 듯 뛰기 시작했고 팔다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양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재희는 저만치 떨어져 내리고 있는 진호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오빠... 오빠? "




재희는 쓰러져 있는 진호를 일으켜 그의 머리를 가슴에 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러보았다.




" ...재...재희야... "




그는 고통 속에서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힘겹게 눈을 뜨고 재희를 올려다 보았다.




" ...위...위험...했잖아... 큰...일... 날뻔했다... "




"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아! "




마음속으로는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재희는 진호를 마주보며 한껏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 ...내...내... "




진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는지 안타까운 표정으로 재희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 오빠? "




재희는 자신의 품 안에서 힘을 잃고 늘어져 버린 진호의 몸을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 오빠... 오빠아!!! "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듯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재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정은 마지막에 가서 흐느끼듯 말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몸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 언니... "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던 재희는 소정을 마주 안으며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오빠는 약속 안지키는 사람... 싫어하는데... "




" 언니... 이제 그만... "




소정은 이제서야 "아직은 만날 수 있잖아."라는 소정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기 위해 이렇듯 가슴 아픈 이야기까지 털어놓은 재희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한참을 부둥켜안고 있던 두 사람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급히 떨어져 각자 눈물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정은 눈물을 닦아내던 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한 사람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 소...소정아... "




금방 닦아낸 소정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미...민... "




소정은 그의 이름을 마저 부를 수가 없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마음속으로 수십번, 수백번, 수천번을 외쳐 불렀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일 것이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재희는 뒤늦게 한 사람이 문가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왜 저런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소정을 쳐다보고 있는지... 그가 어떻게 소정을 찾아왔는지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살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만남이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 자리를 비켜주어야겠지? "




재희는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가까이 다가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도 쓸쓸하고 슬픈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병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 오빠... 나 잘했지? 이쁘다고... 한번만 칭찬해줘... 한번만이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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