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감기 - 2부 14장

본문

감기 - 21 개미의 날개 8




그녀의 전화를 끊고 지하철역으로 가면서 집으로 가는 동선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오늘 그녀


에게 해 줄 것은 닭가슴살과 새우를 넣은 카레라이스였다. 어려운 음식은 아니다. 다만 카레를 


다 먹고 난 후에 그릇에 물드는 노란색 강황색소가 조금 귀찮은 음식일 뿐이었다. 제대로 씻지 


않을 경우 함께 설겆이 하는 그릇의 뒷면에 노란 얼룩이 질 수도 있고, 새하얀 행주가 노란 행주


가 될 수도 있는 재미있는 녀석이 카레라이스이다. 




오피스텔이 있는 상도동에는 대형마트가 없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서 용산에 있는 마트에 들린 


후 집으로 가는 것이 가장 짧은 길이 될 것 같았다. 내가 사용하던 카레파우더는 동네 마트에는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용산에 있는 모 할인매장에서 도착한 후 식료품 코너로 걸어가는데 


장을 볼 때 함께 사면 좋은 것들이 몇 눈에 들어왔다. 차가 있을 때는 부담없이 살 수 있겠지만, 


차가 없어진 지금은 휴지같은 부피가 큰 것을 마트에서 사서 지하철이나 버스로 옮겨가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특히 이벤트 초특가로 팔고 있는 휴지는 너무나 탐이 났다. 사고는 싶지만 부피 때문에 부담스


러운 것들 중에 하나여서 그 앞을 쉽게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한참 가격을 보며 탐내고 있자 오피


스텔 근처 슈퍼에서 들었던 농담이 떠올랐다. 연말이 되니 휴지가 특히 잘 나간다는 그 말이 그


때는 왜 그렇게 웃기게 들렸던지. 한동안 휴지를 바라보며 실없는 웃음을 흘린 나는, 애써 포기


하고 카레할 것과 일요일인 내일 먹을 것을 간단하게 구입한 후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


다. 




집에 도착해 벌써 익숙해진 비밀번호를 눌러 들어가자 내 컴퓨터 책상에 앉아 웹서핑을 하고 있


는 그녀의 옆모습이 보인다. 갈색 치마에 검은색 스타킹을 신고 있는 그녀가 물건이 가득 든 비


닐봉투를 들고 들어오는 날 보며 웃으며 반겨주었다. 마치 여자친구 집에 놀러 온 듯한 오래전


에 잊고 있었던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기분을 애써 진정시


키며 건내받은 봉투를 들고 부엌으로 향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뭘 하고 계셨어요?"


"야한 거라도 있는가 싶어서 찾아 봤는데 안 보이더라구요. 훗훗. 그런 거 안 보시나 봐요?"




식탁위에 올려진 봉투에서 오늘 필요한 식재료와 내일 먹을 것을 따로 나눠서 냉장고에 넣어두


며 그녀에게 대답을 했다.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내 모습을 그녀는 부엌 한 켠에 서서 신기


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야동은 독신남의 필수품인데 왜 없겠어요? 폴더락이 걸려 있어서 검색해도 안 나와요. 락을 풀


어야 보이거든요."


"혼자 살면서 그런 걸 왜 설치했어요? 혹시 저 말고 여기 누가 또 오나 보죠?"




살짝 째려보며 말을 하는 그녀. 이 사람은 사소한 내 말을 흘리지 않고 공격을 할 때가 가끔 있


다. 내 공간안에서 다른 여인의 흔적을 찾을려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미워보이지 않았다. 




"여동생이 여길 와요. 다친 후 반찬이나 청소를 해주러 자주 오는 편인데.. 요즘은 아이 때문에 


잘 오지 못 하지만요. 그때 걸어 놓은 거예요. 오빠에게도 숨기고 싶은 것이 있거든요. 큭큭.."


"후훗, 동생 말고는요? 사실대로 말해 봐요!"


"걱정마세요. 지금 저는 유경씨에게 숨길 게 없어요. 예전에는 이곳을 찾아오던 사람이 있었지만.. "




그 말을 한 후, 내 가슴을 살짝 만지며 그녀에게 말을 했다. 그녀의 눈이 내 얼굴에서 밑으로 흘


러내려 손이 가르키고 있는 가슴에 머무른다. 그리고 한동안 내 가슴을 바라보던 그녀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됐잖아요? 제가 다친지 1년이 넘었죠? 이곳에 오는 사람이라곤 여동생외에는 유경씨


가 제겐 유일해요. 예전 제 모습이 그리 떳떳하지는 않지만.. 유경씨를 속일 만큼 어리석은 놈이 


아니예요."




내 손이 올라가 있는 내 가슴을 한동안 바라보던 그녀가 어떤 의미인지 모를 고개를 몇 번 끄떡


인 후 내 가슴을 만져온다. 그녀의 손이 올라 올 수록 화장품이라고 하기에는 좀 더 풍성한 향기


가 코안에 가득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에 올려진 그녀의 손 위로 내의 손이 겹쳐져 


올라가고, 서로의 손을 통해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옴과 동시에 내 심장의 울림이 그녀에게 전해


지는 것이 느껴진다. 




"이젠 안 아픈 거죠?"


"예, 대신 가끔 가슴이 따끔거릴 때가 있어요."


"어떨 때요?"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묻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 대신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립스틱을 엹


게 바른 그녀의 입술과 바싹 마른 내 입술이 마주쳤을 때 찰싹 달라붙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그


렇게 입술을 마주댄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서로 마주대고 있는 그녀와 나의 심장 울림으


로 시간의 흐름을 느낄 뿐이었다. 곱게 열려진 입술안에서 그녀의 뜨거운 혀를 느끼고, 고르게 


나있는 치아와 입천정을 어루만진 후 떨어질 때는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두 입술이 엉겨있다


가 끈 떨어진 연처럼 헤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씩 멀어지는 그녀와 내 얼굴 사이로 조


금전의 시간이 어떠했는지 격한 숨소리가 달콤하게 지나간다. 




"유경씨를 바라보고 있으면 늘 가슴이 아파요. 칼로 찌르듯이.."


"어떡게 하면 안 아플까요?"




몽롱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며 말을 하는 그녀. 이 상황에서 더 분위기를 잡아도 좋지만, 식탁에 


올려져 있는 식재료를 다듬어 밥을 하는 것이 더 급했다. 배고픈 여자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 만


큼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남자도 없을 테니까. 일단,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겸 분위


기를 바꾸기로 했다. 




"이렇게 키스를 할 때는.."


"훗."




내 말에 웃으며 고개를 숙이던 그녀의 이마가 내 코를 치고 지나간다. 아픔이 살짝 지나가고 코


를 움켜진 내 모습에 그녀가 놀라며 얼굴을 감싸온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밥 먹어야 하는데.. 밥 먹으라는 뜻인가 보네요. 기다리고 계세요. 금방 준비할테니까요."


"후훗, 제가 도와줄 건 없어요?"


"전 제가 칼 잡고 있을 땐 누가 옆에 있는 거 싫어해요. 괜찮으니 컴퓨터로 웹서핑을 하시거나, 


책장에 꽂혀있는 파일들은 제 포트폴리오니까 그거 구경하셔도 되요. "


"오늘도 기대할께요."


"점점 유경씨의 기대치가 부담스러워지고 있어요."


"그러게 누가 저보다 음식을 잘 하라고 했나요? 어서 밥해줘요. 나 배고파요. 후훗"


"예~예~ 마님.. "




그녀의 웃음을 뒤로 하고, 마트에서 사 온 닭가슴살을 물에 깨끗하게 씻은 후 껍질을 벗기고 적


당한 크기로 다듬었다. 집에 있는 맛술을 약간 뿌려주어 잔냄새를 없애 준 후 Thyme를 손바닥


으로 비벼 가루를 낸 후 뿌려주었다. 그렇게 분홍색으로 잘 다듬어진 닭고기에 소금으로 밑간을 


해서 냉장고에 재워둔다. 당근과 피망을 다듬고, 양파를 까서 썰어 놓은 후 칼로리가 높은 감자


대신 느타리버섯을 적당하게 썰어 한쪽 그릇에 담아 놓았다. 몇 가지 야채를 더 손을 본 후 뜨거


워진 팬에 기른을 살짝 두르고 닭고기 부터 젖가락으로 볶으며 카레에 넣을 재료를 익히기 시작


했다. 야채가 반쯤 익어가자 냄비에 쏱아 붓고 미리 물에 게어 놓은 카레를 야채 위에 부어주었


다. 그리고 조리를 할 때 사용하는 나무 숟가락으로 카레를 저어주며 끓이기 시작했다. 그때부


터 오피스텔안은 온통 카레 냄새로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호오, 벌써 다 한거예요?"


"아뇨, 이제 조금만 더 익히면 되요. 딱히 오래 끓일 재료는 없지만 닭고기는 푹 익혀야 하니까요."


"요리를 꽤 많이 했나 봐요?"


"혼자 살잖아요. 그리고 캐나다에 있을 땐 홈스테이하기 전엔 자취도 꽤 했었구요. 그땐 싸구려 


음식으로 떼우는 열 가지 요리를 만들기도 했었는데.. 큭큭."




내가 말을 하는 동안 그녀는 컴퓨터 모니터를 끄고 부엌으로 다가왔다. 냄비안의 카레를 바라


보다 웃음을 지으며 찬장에서 그릇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다 익은 것 같은데, 제가 밥을 담을께요."


"예, 수저와 젖가락은 두번째 서랍안에 있어요. "




카레를 만들다 남은 자투리 야채로 만든 달걀말이를 먹기 좋게 썰어 놓고, 그녀가 준비한 밥위


에 카레를 부었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 지나서인지 냄새를 맡고 있으니 배고픔이 더 해지는 기


분이었다. 평소 혼자 해서 먹을 때 보다 향이 더 구수한 것 같다.




"냄새는 정말 좋은데요."


"요즘 유경씨 눈이 어찌나 높아졌는지.. 갈 수록 맞추기 힘들어요. "


"큭큭.. 정성 가득한 이런 밥. 저 좋아해요. 걱정마세요. "




그렇게 말하던 그녀가 뜨거운 김이 나는 수저를 입에 넣고 한동안 우물거리더니 동그랗게 눈을 


말고 내 얼굴을 쳐다본다.




"어떤데요? "


"너무 점수를 높게 주면 자만심이 생기니까.. 흐음. 한 B 정도? 후훗"


"에잇! 적어도 A는 바랬는데.. 저 다음에 재수강할래요. 다시 줘요!"


"먹던 밥 뺏어가는 놈 만큼 미운 놈도 없다는 거 알죠? 큭큭.."




예전이라면 감히 생각지도 못 했던 이런 즐거움. 별 것도 아닐지 몰라도, 이렇게 마주 보고 밥


을 먹으며 가벼운 웃음을 나눌 수 있는 이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런 한 편으로 가


끔씩 찾아오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어렵게 찾아온 내 행복을 짓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밥


을 먹는다. 언젠가 내게 찾아올 사라진 암표범의 그림자는 아직도 내 주위에 아른거리고 있었


다. 표범이 할퀴고 간 그 흔적이 내 몸에 남아있는 한, 난 이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 하리라. 지


금 내가 만들어 가는 이 작고 나약한 울타리안에 표범이 뛰어들어 자칫 눈 앞의 여인에게 달려


들지 않을까 두렵기까지 했다. 부질없는 바람일지라도 이 행복한 시간이 길고 오래 지속되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뜨거운 카레밥이 입을 거쳐 배안에 들어가자 뜨끈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


가고, 그 퍼지는 열기만큼 몸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식사를 끝마치고 그녀가 설겆이를 하는 동안 서랍에서 허브를 꺼내 차를 끓였다. 카레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오피스텔안에 Lemongrass의 진하고 세콤한 향이 퍼지기 시작한다. 물이 끓고 


있는 포트에 스푼으로 허브를 넣은 후 뚜껑을 덮고 불을 껐다. 벌써 설겆이를 다 했는지 어느세 


그녀가 돌아보고 있었다. 




"설겆이 정말 빠르네요. 나보다 빠르네.."


"집에서 공주처럼 아무 것도 안 하는 줄 알았어요? 청소도 곧 잘 한다구요."


"호오, 그럼 나중에 실력을 한번 기대할께요."


"꼭 청소해 달라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큭큭.." 


"우리 양치질 하러 가죠? 키스할려면..후훗"


"어머! 누가 한데요? "




그렇게 장난을 치며 그녀와 함께 양치질을 하러 화장실로 향했다. 오래전 그녀가 내 오피스텔


에 처음와서 썼던 칫솔이 내 칫솔과 함께 작은 머그컵에 담겨져 있다. 치약을 듬뿍 짜서 그녀에


게 건내주자 살짝 눈웃음을 흘리더니 내 옆에 서서 나란히 양치질을 하기 시작한다. 거울을 통


해 보이는 두 남녀는 입가에 하얀 거품을 머금고 눈으로 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유경의 옆에서 양치질을 하는 내 모습 뒤편으로 무언가가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하


는 것이. 언제부턴가 내가 거울을 보면, 거울속 내 얼굴 뒤편으로 또 다른 얼굴이 흐릿하게 나타


나곤 했다. 그것은 형체를 알 수 없는, 마치 안개위로 비춰진 내 그림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


다. 그 얼굴의 주인이 누구인지 나 또한 알 수 없지만, 애써 모른 척을 할려고 할 수록 매서운 눈


빛으로 날 사로잡아 어디론가 끌어 가려고 했다. 거울에서 시선을 돌릴려고 하지만, 이미 내 몸


을 흐르고 있는 내 혈액들이 그 얼굴에, 그 눈빛에 복종을 하듯 들끓기 시작하고, 그녀의 눈웃음


을 거울을 통해 바라보며 잔잔하게 고동치고 있던 심장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가


빠져 온다. 가슴 한 쪽을 날이 안 선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에 가득 머금고 있던 새하얀 거품이 


세면기 위로 쏟아져 내린다. 




"쿨럭!.. 크윽... "




가슴을 쥐어짠 채 찡그린 내 얼굴을 보고 그녀가 입안의 거품을 재빨리 정리한 후 내 어깨를 잡


아 온다. 




"우영씨! 괜찮으세요? 예? 병원에 연락할까요? "


"으윽.. 죄송해요. 쿨럭.. 저 괜찮아요. 괜찮아요.. "


"많이 아프신 거 같은데.. 약이라도 가져올까요? 어디 있어요?"


"아뇨. 정말 이젠 괜찮아요. 걱정마세요. 가끔 이래요. 괜찮아요.. 쿨럭!"




다시 한번 목줄기 한가운데를 잠식하고 있던 거품을 내뱉은 후, 아직도 애처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젖먹이 어린 아이가 무서울 때 엄마의 품을 쫒듯이 그렇게 난


유경의 가슴에 안겨 떨리는 몸을 그녀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우영씨?.... "


"잠깐만 이렇게... 유경씨."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날, 그녀가 따쓰하게 안아온다. 지금은 누가 


누구를 위로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렇게 안고 있을 때에야 조금전 


날 괴롭혔던 꿈속의 악마로 부터 피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날 걱정해주는 그녀를 내가 


위로해 주고, 그런 날 그녀가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어 주며 위로해 준다. 마치 상처받은 강


아지 두 마리가 서의 몸을 햝아주는 것 같은 애처로운 몸짓이 화장실안에서 오랫동안 지속되


었다.




다시 잔잔해지는 심장을 느끼며 그녀와 함께 부엌으로 돌아왔다. 침대가 있는 방에 갈 수는 없


으니 좁은 오피스텔에서 부엌 말고는 딱히 둘이 있을 곳이 없다. 식탁과 의자가 있어서 이야기 


하기도 편하고 좋았다. 식탁앞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적당히 식은 Lemongrass를 찻잔에 담아 


그녀에게 가져다 주었다. 의자를 그녀 옆에 가져다 놓고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했다.




"향이 특이한데요. 이건 뭐죠?"


"Lemongrass라고 적도 근처에서 재배하는 허브예요. 식후에 먹으면 좋아요."


"허브 좋아하시나 봐요?"


"원래 커피와 홍차를 좋아했는데.. 이젠 커피를 마시지 않거든요. 홍차는 가끔씩 마시지만 카페


인이 너무 많아서 가슴 때문에 자주 마실 수는 없어서, 그러다 보니 자연히 허브를 찾게 되더라


구요."


"커피는 왜요? 조금전 아팠던 거와 상관이 있는 건가요? "




난 대답대신 찻잔을 쥐고 있지 않은 그녀의 왼손을 잡고 내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한동


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가 서서히 시선이 내려가며 그녀의 손에 


닿아 있는 내 가슴을 바라보는 그녀. 그리고 고개를 들지 않고 내게 속삭이듯 말을 했다. 




"우영씨 몸에는 그 사람 흔적이 무척 많아요. 저 사실... 부담스러워요. 걱정도 되구요."


"유경씨. 이건 그 사람이 남겨둔 흔적같은 게 아니예요. 그리고 유경씨에게 이런 제 모습을 지


우거나 숨길 생각도 없구요."


"그럼요?"


"그녀는 떠나간 사람도 아니고, 사겼거나 사랑했던 사람도 아니예요. 하지만 제가 그 기억을 이


렇게 가지고 있는 건 옛추억을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유경씨를 만난 후 다시는 그때로 돌아


가지 않으려는 제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예요. 다시는 그때처럼 바보같은 짓을 하지 않으려 하


는 맹세이구요. "




그녀의 왼손을 잡고 있던 손을 올려 그녀의 뺨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




"물론 유경씨의 눈에는 제 이런 모습과 행동이 마치 지난 시간을 잊지 못 하는 어리석은 남자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전혀 아니예요. 유경씨를 만난 후의 결심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몸에 세긴 


화인같은 거예요.. 전 유경씨만 바라보고 있어요. 지금도, 앞으로도요."




그녀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며 둥글게 말리기 시작하더니 눈웃음 짓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내 


가슴에 올려져 있던 왼손이 그녀의 뺨을 만지고 있는 내 손에 겹쳐지고 한동안 부드러운 그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손등, 그리고 팔목을 지나 어깨를 넘어 온 그녀의 손은 내 목뒤를 넘


어가 내 목을 살짝 당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만큼 난 그녀의 얼굴과 가까워졌다. 천천히 다가


갈 수록 그녀의 몸에서 묘한 향기가 전해져 왔다. 희미하게 웃고 있던 그녀의 입술이 살짝 다가


왔다가 떨어지고 간지럽게 속삭인다. 




"나만? "




짧은 물음. 그러나 그 물음이 어떤 뜻인지 모를리가 없었다. 그녀의 웃음 만큼 내 마음을 보여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도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떡인다. 가끔은 말보다 몸짓이 더 진심


으로 다가올 때가 있으니까. 그런 내 마음이 통했는지 그녀는 조금 전 보다 더 환해진 미소를 지


으며 두 팔로 내 목에 안겨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내 가슴에 부딪혀 오고, 그녀가 


내뱉은 뜨거운 숨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 간다. 그 황홀한 기분에 양팔 아래로 손을 넣어 그녀


의 등을 껴안고 품에 끌어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또 다시 내 입술로 느낄 수 있었다. 마


주친 두 입술안에 조금전 우리가 마셨던 Lemongrass의 부드러운 향이 그녀의 따뜻한 혀와 함


께 넘어 온다. 그리고 내가 그러듯이 내 입안에 고여있는 침을 그녀 또한 모두 가져가는 것을 보


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구의 목에서 나는 소리인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기 시작하고, 그녀의 손이 내 목


에서 등으로 그리고 다시 어깨로 타고 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그녀의 손짓을 따라 


그녀의 등과 어깨, 그리고 그녀의 팔을 만지다가 한 손이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 마냥 저절로 


그녀의 봉긋한 가슴으로 옮겨가 거머쥐기 시작한다. 손에 주어지는 힘 만큼 그녀의 가슴속 요동


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내 품에 스며 들어오는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어 갔다. 




그렇게 끈적하고 따뜻한 키스가 한동안 이어지고 살짝 서로의 입이 떨어졌을 때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그녀가 내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좋아해. 정말.. 그리고 우영씨 사랑해.."




그 오랜 시간 동안의 기다림에 이제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그녀의 말에서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양 뺨을 잡고 부드럽게 만지다가 내 뺨에 대었다. 뜨겁게 달


구어진 핫팩을 뺨에 댄 것처럼 그녀의 뜨거운 체온이 한번 부서졌던 내 가슴을 녹이기 시작했


다. 쇳물보다 뜨거운 혈액이 온 몸을 휘돌아 가고, 그 만큼 거친 숨이 코로 내뱉어 진다. 한동안 


그 뜨거움을 느끼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이마와 눈꺼풀에 키스를 하고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


이듯 말을 했다. 




"고마워 유경아. 사랑해."


"나도.."




다시 시작하게 된 그녀와의 키스. 그러나 조금전과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더이상 망설일 필요


도 그리고 내 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그녀의 열려진 입안에 내 


혀를 넣고 그녀의 따뜻한 침을 삼키면서 내 손은 그녀의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


리고 내 손의 움직임을 느낀 그녀도 내 셔츠의 단추를 풀며 우린 서서히 일어나 침실로 뒷걸음


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움직이면서도 서로에게 붙어 있는 입술은 떨어질 줄 몰랐


다. 이미 우리의 가슴은 뜨거움에 녹아 하나가 되어 있었다.




침실로 향하는 동안 그녀의 코와 내 코를 통해 거칠고 뜨거운 숨이 끊임없이 세어 나온다. 반쯤 


열려진 침실문을 발로 대충 차서 활짝 열고 그녀를 껴안고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대충 벗겨진 


셔츠와 런닝을 한 번의 손길로 벗어 재낀 후, 바지마저 허물 벗듯이 던져 버리고 그녀에게 다가


갔다. 내가 옷을 벗는 동안 그녀도 블라우스와 치마를 벗고 내 모습을 바라보며 검은색 팬티스


타킹을 벗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갈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도 내 눈에서 그


것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나란히 달리던 평행선이 한 점에서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2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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