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광풍폭우(狂風暴雨) - 1부 3장

본문

제 1 장 첫사랑




- 3 -




엠티를 다녀오고 소연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두 달간 모인 회비로 책도 사고, 동아리 방내에 책장도 다시 만드는 등 기말고사 기간이 되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소연 사람들끼리 더욱 친밀해졌지만 후와 순진의 관계는 그전에 비해 그리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후에게는 전과 다름없이 자신을 대하는 순진의 모습은 왠지 모를 서먹함으로 다가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순진이 후에게 말을 잘 걸지 않는 것이었다. 후조차도 가끔 순진과 눈이 마주치면 피해버렸으니……. 아마 말을 걸었다면 아마도 그는 대답을 머뭇거렸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후에겐 그날 밤 강가에서 있었던 일이 꿈인 듯 했다. 스스로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한건지 하며 멍하게 있는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스러울 뿐이었다.


엠티 이후 후에게는 변화가 생겼다. 상상 속에서 강가에서의 일을 이어나가는 것이었다. 상상 속의 그는 부드럽게 순진을 안고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순진이의 입을 타고 목을 넘어 가슴까지… 그러다 보면 이미 후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기 일쑤였고, 허탈한 표정으로 화장실 문을 나서곤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후의 상상의 대상은 일정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이나 학창 시절 짝사랑하던 여자애들, 혹은 섹시한 동네 아줌마들이 상상의 나래 속에서 옷을 벗었다. 그런데 그것이 순진이만 그 상상 속의 주인공이 되어있는 것이었다. 떨치려고 애를 써도 으레 자위를 할 때면 순진의 이름을 돼내게 되었다.


처음엔 그저 그런 것이려니 했지만 몇 주가 지나자 도저히 순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지경이었고, 나중엔 흘끔흘끔 가슴이나 엉덩이를 훔쳐보게 되었다. 그런 그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스물하나의 청춘은 그런 상념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후 스스로내린 판단은 건강하니까 여자를 보고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상대가 순진이라는 것은 그의 고질적인 증세 중의 하나인 짝사랑이라는 것으로 판명 내렸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니 순진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그리 부담되지는 않게 되었다. 서먹서먹한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5월말이 되자 학교는 다음 주가 기말고사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축제분위기로 한껏 들떠 있었다. 교수들도 기말고사 공부를 하라며 휴강을 해버리는 것이 통례가 되어버렸기에 타는 불에 기름이라도 부어버린 것처럼 학교의 축제 열기는 꺼질 줄 몰랐다. 축제는 금요일에 끝이 났지만 토요일의 캠퍼스는 아직도 군데군데 잔디밭에서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후는 이런 분위기를 애써 무시하며 기숙사에서 나와 동아리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후는 막내다. 위로 형과 누나가 하나씩 있다. 둘 다 대학 입학해서 첨 받아온 것이 학사경고장이었지만, 그들이 다니는 곳은 지방에 있는 국립대학이라 등록금이 싸기 때문에 자기들이 과외나 아르바이트로 용돈과 학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그는 서울이라 학비도 두 사람이 합한 것보다 많이 들고 따로 생활비가 들어가야 됐다. 장항금은 고사하고,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최소한 학사경고장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그는 시간을 쉽게 허비하는 걸 싫어했다. 그렇다고 해서 술자리나 엠티 같은 걸 따라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남들보다 잠자는 시간이 좀 적은 것뿐이었고, 자투리 시간을 허비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동아리 방은 주말이 되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도서관에 있으면 사람들 때문에 집중을 하기 힘들었고, 아는 얼굴도 많이 마주쳐야 했다. 가끔은 기숙사 폐인들이 술을 마시자고 찾아오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주말에는 동아리 방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게다가 담배를 물어도 터치할 사람이 없고, 소리 내어 커피를 마신다고, 삐삐가 소리가 난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기에 더욱 좋았다. 그래서 후는 동아리 방을 공부방으로 자주 애용했다.


그날도 시계겸용인 삐삐를 책상 위에 놔두고 모레 있을 시험 과목을 정리하고 있었다. 진동이 느껴져서 번호를 보니 순정이가 넣은 음성 메시지였다.




“후야! 난데 그저께 부탁한 교양 시험 자료 있잖아… 그거 지금 좀 필요한데 너 지금 어디니?”




동아리 동기들끼리 친목도모와 학점관리를 위해 수강 정정 기간에 같이 교양 두 과목을 신청했었다. 후도 며칠 전 순정이 자료를 좀 구해다 달라고 해서 모아둔 것이 기억났다. 순정에게 지금 동아리에 있다고 메시지를 남긴 후 다시 공부를 하고 있으니 순정이가 와서는 자판기 커피를 가져다주며 자료를 복사해갔다. 순정을 보내고 두어 시간 정도 공부를 하다 보니 시계가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물쇠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동아리 방은 항상 잠궈 두고 다녔다. 회원들만 열쇠를 복사해서 쓰기 때문에 들어올 사람이라곤 회원과 수위 아저씨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오후에 수위 아저씨가 다녀갔기에 올 사람이라곤 없었다. 돌아보니 순진이였다.




“후… 있었네.”




“응? 순진이 네가 오늘 여기 웬 일이냐?”




후가 주말에 여기에 있다는 건 동아리 내에서 잘 모른다. 어찌됐건 엠티 이후 처음 둘이서 말을 해보는 것이라 가슴은 떨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평상시처럼 대했다.




“방금 도서관에서 순정이가 니가 여기 있다고 해서 와 봤어.”




“응… 그래. 너도 공부하러 학교 왔구나. 그래, 공부는 좀 했어?”




“응? 아니… 공부하다 잘 안 되서……. 근데…후야!”




“왜?”




“나 술 한 잔만 사줄래?”




‘이 기집애가 술도 약한 게 뭔 소리래?’




그나마 학기 초 보다는 많이 세졌지만. 아직까지 후가 보기엔 약한 수준이었는데 갑자기 술이라니… 후도 할 말을 잊었다.




“응……? 술?”




“아냐, 싫으면 괜찮아. 너두 담주에 시험이잖아. 괜히 이야기 꺼냈나봐. 미안…….”




그도 해야 할 분량이 약간 남아 있었지만 순진이가 저렇게 까지 나오는데 들어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냐 나도 한 잔 하고 싶었어. 그럼 나가자. 그럼 개술집으로 가자.”




“응, 고마워. 근데 정말 괜찮아? 괜히 나 때문에 그러는 거 아냐?”




“걱정 마셔, 이 아가씨야. 벌써 다음 주 시험 준비는 다 해뒀어.”




“그래? 다행이다. 후도 보기보단 성실하네?”




“무슨… 그리 섭한 말을……? 내가 어때서리…….”




“호호호……. 농담도 못 하겠다. 과민 반응 아니니?”




후는 더 이상 하면 본전도 못할 거 같아 말을 딴 데로 돌린다.




“그래, 안주는 뭐가 좋을까? 개술집 전문 안주 불닭발 어때? 너 좋아하잖아?”




“후야, 오늘 개술집 말구 다른데 가면 안 될까? 오늘 왠지 거긴 가기 싫어. 아니 학교 부근에서 마시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자”




동아리에서 술을 마시면 항상 거기만 갔었기에 오늘도 거기려니 하고 말을 건넨 건데 어째 분위기가 묘했다. 순진이 누구에게 술을 따로 사달란 건 처음이다. 후도 다른 동네가 궁금했던 참이었고, 순진에게 호감이 있었기에 좋은 곳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다행이 후는 얼마 전에 과외비를 받은 것이 있어서 지갑에도 여유가 있었다.




“그래, 그럴까? 근데 어디로 가지? 학교 부근 말곤 나 잘 모르는데……. 어디 아는 데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거 보단… 일단 학교에서 벗어나고 보자.”




평상시랑은 다른 모습에 후가 갈피를 못 잡는데 순전이가 택시를 잡고 종로 1가로 가자고 한다. 그도 얼떨결에 택시에 올라탔다. 종로에 도착하자 순진이 택시비를 냈다. 술은 후가 사는 것이니 택시비는 자신이 내는 것이란다. 택시에서 내리니 여섯 시쯤 되었지만 초여름이라 그런지 아직 밝았다. 우선 술집을 찾아야 되는데 후도 처음 와보는 곳이라 어디에 술집이 있는지 몰랐다. 인사동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다 보니 전통주막이라는 간판이 눈에 뜨인다.




“순진아, 저기 어때? 저기 보이는 전통주막 말이야.”




“응, 그래.”




가게 안은 마당처럼 되어 있었고, 여러 개의 평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평상 위에 작은 상이 놓여져 있는 - 그야 말로 주막인 듯 꾸며 놓았다. 앉아서 안주로 순진이가 좋아하는 알탕과 닭발을 주문하고 소주를 시켰다. 술을 마시는데 순진은 아무 말이 없다. 첨엔 후가 분위기 바꿔보려고 이런 말 저런 말을 꺼냈으나 대답이 없기에 입을 다물고 애꿎은 술만 비워대고 있었다. 소주가 세병 정도를 비워졌을 때였다.




“후야!”




“응? 왜 그래?”




“……”




“무슨 일인데?”




“저어…….”




“응, 말해봐.”




“왜 술 사 달랬는지 궁금하지 않아?”




“음… 잘 모르겠어.”




사실 평상시완 다른 분위기의 순진이었기에 후도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요새 왜 나한테 말 안 해?”




후는 가슴이 뜨끔했다. 상상 속에서 순진이의 벗은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분명 잘 익은 토마토 같았을 것이다. 후도 사실대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보니 퉁명스럽게 쏘아대고야 말았다.




“뭐, 너도 요샌 나한테 말 안 걸잖아.”




“그래도 너처럼 눈을 피하진 않아.”




순진의 목소리에 가시가 느껴지자 대답을 잘못했다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입장이고……. 차라리 모르겠다고 말 할걸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재차 물어온다.




“그럼… 접 때 강가에서… 그 일 때문에 그런 거야……?”




후는 갑자기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이 기집애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으… 응……? 아냐, 그런 거…”




“근데 그날…, 왜 나…한테… 키… 스 안 한거야?”




후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순진도 그 때 일 때문에 그에게 계속 말을 하지 않은 게 확실했다. 순진의 얼굴도 새빨갛다.




“내가 싫은 거였니?”




“……”




“그런 거였어?”




순진의 목소리는 화가 난 듯 하다. 후도 어떻게든 풀어주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런 거였지… 내가 뭘 바라겠어…….”




눈치 없는 후였지만 이건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순진은 화나 난 듯 혼자서 연거푸 술잔을 비운다.




“저어……”




“뭐?”




“니가 싫은 게 아니라… 니가… 싫어할 까봐, 내가 실수 하는 게 아닌 가 했었어.”




“무슨 말이야? 똑바로 해봐.”




이미 뱉은 말이었다. 후의 입에서는 두서없는 말이 계속 나왔다.




“실은 나 너 첨 보던 날부터 쭈욱 좋아했었어. 근데 그날은 나만 좋아서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너나 나나 술기운이었나 싶기도 하고, 나도 첨이었고 그래서…”




“바보…….”




순진을 바라보니 약간의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자신을 싫어하지 않음을 알자 후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예전 같았으면 피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순진도 마찬가지였다.




“둔탱이, 미련 곰탱이, 나가 죽어라.”




“야 말이 넘 심한 거 아냐?”




“넌 이런 말 들어도 싸. 그 상황에서 싫은데 눈감는 여자가 어딨어? 나 너 좋아… 나도 첨 본 날부터 그랬어. 그날은 나도 처음이라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단 말……. 어머!”




후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 밥상을 타고 넘어가 순진이를 안아 버렸다. 순진도 첨엔 밀치는 것 같더니 이내 같이 끌어안는다. 그러길 잠시 후 갑자기 후를 밀쳐 내고 때리기 시작했다.




“야! 사람들이 보잖아?”




후는 무안해서 순진이를 안았던 손을 풀고서 머리만 긁적였다. 많이 맞았지만 아프지도 않았다. 주위에선 휘파람까지 분다.




“남자가 뭐 그래?”




“맞아, 안았으면 꽉 잡아야지.”




“아가씨도 너무 하네. 그런다고 때리면 쓰나?”




그들은 사람들의 야유 비슷한 부러움을 뒤로 한 체 가게를 뛰쳐나왔다. 후는 기분이 좋아 술이 더 마시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이미 감정에 취했기 때문이었다. 순진도 그랬나보다. 어두워진 종로거리를 나와 동대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순진이 말없이 팔짱을 낀다. 둘 다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후는 팔뚝에 전해오는 말랑말랑한 느낌에 사타구니가 가려웠다. 들키면 쪽박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순진이가 부끄러운 듯 애길 꺼냈다.




“접때부터 계속 끼고 싶었어.”




야한 상상을 떨쳐버리며 후는 부드럽게 말했다.




“앞으로 계속 그래두 돼. 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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