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프로젝트 X - 3부

본문

밤무대 가수의 열창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도 기타 반주가 바뀌고 어설픈 아마추어의 노래가 흐르자 의외라는 듯 잠시 노랫말에 귀 기울였지만 자신만을 위해 멀리 이 곳까지 차를 몰고 온 사람들은 다시 무관심 속으로 분위기를 묻어 버렸다. 처음 왔지만 분위기 파악이 어렵지는 않았다. 가까이 있어도 서로 못 본척 하는 곳. 어색한 소리가 나더라도 못들은 척 해주는 곳. 남녀가 어색해 보이더라도 있을 법한 일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해 주는 곳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오는 곳이다. 도심 도처에 놓여 있는 자판기는 동전만 넣고 버튼만 누르면 맛있는 커피를 뱉어내지만 이 먼 곳까지 와서 달랑 물컵 한잔 분량의 커피를 거금 만원 정도를 지불하고 마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원한 캔맥주 한잔으로 일상을 떨어버릴 기회가 많은데 불구하고 음주단속의 위험을 무릅쓰고 십만원 가까운 거액을 던지며 이 곳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파 몇다발과 밀가루 한 대접이면 배터지게 먹을 수 있는 파전 한조각을 위해 몇만원을 기꺼이 투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곳 카페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속 마음이 모두 같을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카페와 어우러진 모텔을 자연스럽게 이용하기 위한 아까운 투자일 수도 있다. 여행을 즐기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시간을 아끼지 않는 사람과 달리 이 사람들의 목적은 단순하고 순수하다. 낯설게 만나 가장 빨리 성적유희를 위해 분위기를 돋구는 일종의 투자행위를 선행하기 때문이다. 먼 발치에서 삼사년을 지켜보다 가슴앓이하며 끝내는 말 한마디 못하고 세상을 달리한 사람들과 달리 첫 눈에 반해 사랑을 키우기 위한 수많은 과정들을 일시에 생략하기 위한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을 뿐이다. 이들에겐 순수한 사랑의 감정에서 노랫말이 흘러 나왔을 숙의 목소리가 신기하고 듣기 거북한 일면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 곳에 있는 사람들 만큼은 아무런 과정없이 코스 요리를 먹듯 당연히 모텔을 향한 전초기지에 동참한 사람들이기를 바라는 사람들 속에서 숙의 목소리는 사랑하는 사람도 이 곳에 머물 수 있다는 자랑스런 뽐냄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어깨가 으쓱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대단해. 당신 노래 한 소절이 카페 분위기를 잠시나마 바꿔 버렸어.”




“내 맘과 노랫말과 같잖아요.”




“당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노력할께.”




“로봇을 만들게 되면 당신을 닮게 만들어서 도봉동으로 보내면 안될까?”




“아직 시간이 많아.”




“초조하단 말야.”




“첫 출근했으니까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많잖아. 시간을 갖고 해결 방법을 찾아 보자.”




”요즘처럼 조급하게 살아 본 적이 없어요. 당신만 생각하면 모든게 안타깝고 조급해져요.“




“어려운 문제는 쉬운 문제의 결합이라고 말했잖아. 지금 당장에는 도저히 끝을 찾을 수 없는 엉킨 실타래처럼 보이지만 찬찬히 바라보면 그 끝을 찾을 수 있게 될테지.”




“요즘 전 당신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떤?”




“첫째는 당신이 나의 사업파트너가 돼서 기쁘다는 것이고 둘째는 매일 밤낮으로 붙어 있으면서도 남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결합한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겠지. 일을 존중하고 그래서 소중한 우리의 일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결합한 것이니까 우선될 것은 일이고 그 다음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가득한 마음이니까. 다른 커플처럼 단순히 사랑만을 위해 만난 것 보다는 정신적인 안정감이 있게될 테지. 사랑하는 사람이 일까지 공유한다고 할까?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의 이분법만 갖고 있는 다른 커플과 달리 우리에겐 남들이 넘 볼 수 없는 우리만의 일이 또 한가지 더 있는 셈이잖아.”




“그래서 당신 같은 사람을 쑥맥이라고 하죠. 사랑이 개입되지 않았을 때는 여자도 당당하게 일을 하지만 사랑이 개입되면 여자는 사랑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아셔야해요.”




“다른 사람들이나 그렇겠지. 그래서 중요한 일을 앞둔 사람은 여자를 멀리하라는 말이 있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냉철한 과학자이면서 프로젝트의 후원자이기도 한 역할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잖아.”




“만약 사랑이라는 매개체가 없었다면 나도 로봇 프로젝트는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했을꺼에요. 일을 택했고 당신을 택했을 때 프로젝트는 존재하겠지만 사랑이 없었다면 무리수를 쓰면서까지 일을 택하지는 않았겠죠.”




“결국 당신의 열정적인 사랑이 논리적 합리성을 찾기 보다는 맹목적으로 내 일에 개입함으로써 우리의 관계를 지속시키려는 것 뿐이었을까?”




“솔직히 말하면 그랬어요. 전 당신의 사랑을 먹고 사는 여자니까요.”




“더 솔직히 말하면 우린 서로에게 반했던 거야. 나는 당신의 차가운 이성에 반했던 것이고 당신은 스스로 떨쳐 일어나서 마땅히 해야할 과제를 대신 수행해 주는 나를 택했던 거지.”




“그랬을 수도 있어요. 인정해요. 하지만 내게 있어 가장 큰 가치는 당신의 사랑을 차지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는 말아요.”




“당신처럼 일에 파뭍혀 결혼조차 생각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사랑으로 완전무장한 태도를 보이니까 조금 달라 보인다.”




“저도 여자에요. 다만 제가 사랑할 대상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죠. 이제 당신이 내 사랑을 받아줄 유일한 사람이 되었으니 나의 이런 태도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요.”




“알았어. 당신의 차가운 이성도 결국은 뜨거운 감성 앞에서는 허물어지고 말았군.”




“모든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에요. 당신, 바로 당신에게서만 느껴지는 감정이니까요.”




“내가 하는 일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어. 대기업이나 국가에서도 엄두내지 못하는 프로젝트를 계획한 만큼 일이 우선되어야 하지. 당신 학생들에게도 과제를 분담시키며 프로젝트의 공유와 확대에 주력할 생각이야. 하지만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보다 우선이라는 것을 잊지 않을게.”




“내 손을 꼭 잡아줘요.”




숙은 앙증맞게 작은 두 손을 모아 탁자 위에 얹고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모아진 두 손위에 내 손을 내 밀어 포근하게 감싸듯 가볍게 쥐었다. 두 사람의 체온이 실린 따스한 손이 포개지면서 아득하게 저며오는 가슴 속의 슬픔을 느꼈다. 나는 손 안에 잡힌 숙의 손을 힘껏 잡으며 사랑과 일을 함께 지켜내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불태웠다.




촛불이 활활 타 올랐다. 주변에 많던 사람들은 어느새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하나 둘 자리를 비워 버렸다. 청소를 위해 의자를 들어 올렸다 내리는 꿍쾅 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릴 무렵이 될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의 눈 빛을 바라보며 끝없는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다.




“비가 왔으면 좋겠어요.”




“별이 총총한 걸 보니 비가 내릴 가능성은 없겠는걸?”




“아냐, 비가 왔으면 좋겠어. 당신을 처음 만난 날도 비가 왔었잖아요.”




“그랬었지. 초라한 몰골로 이리저리 차를 잡던 날이었지.”




“또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라도 비가 꼭 왔으면 좋겠어요.”




“기우제라도 드릴까?”




“비는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는 축복이란 말이에요.”




“비 대신 시원한 강바람이 불잖아.”




“그래요. 비가 올 턱이 없죠? 별이 총총한 밤이라도 우리를 위해 비가 뿌려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별이 밤하늘에 수북히 박혀있었다. 강바람이 서늘하게 불고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은 뜨거운 여름날의 온기를 스치며 씻어내려 차가운 느낌이 들도록 했다. 밤하늘을 쳐다보는 숙에게 다가서며 가볍게 뒤에서 안아 들었다. 온 몸을 맡기듯 뒤로 기지개를 켜는 숙의 몸을 고스란히 받아 들였다. 가슴으로 받아 들였다. 한 손으로 숙의 아랫배를 안았다. 한 손으로 그렇게 스러져 들어오는 숙의 가슴을 받아 들였다. 아흑하는 심연의 소리가 함께 귀에 들렸다. 소스라치듯 몸을 의지하며 짧고 강력한 성감을 느꼈다. 그런 숙의 뒤에서 어깨 위와 목덕미를 향해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었다. 보드랍게 파고드는 숙의 어깨가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아래가 불쑥 솟아나고 있음을 알았다. 조심스럽게 솟아난 그 것을 부벼댄다. 또 한차례 심연의 포효가 들렸다.




“숙아, 이젠 집에 가자.”




“몇신대?”




“벌써 열한시가 넘었어.”




“이왕 나온거니까 양평쪽으로 한바퀴 드라이브 하고 가면 안돼?”




“괜찮지. 그 쪽에 볼만한 것이라도 있어?”




“없어. 낼부터 휴가라니까 몸이 풀려 버리네.”




“방황하지 말고 집에 가서 푸~욱 쉬면 어때?”




“피, 당신이 쉬긴 해? 밤새도록 내 몸을 탐할 거면서...”




주차장에서 차를 빼오자 숙은 옆 자리에 앉았다. 적어도 오늘 만큼은 숙이 원하는대로 해 주고 싶다. 라이트를 켜고 양평쪽으로 방향을 돌려 차를 몰았다.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차가운 밤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오디오 씨디를 틀기 위해 엠프에 파워를 넣었다. 귀에 익숙한 가락들이 차 안을 가득 채운다. 그때 숙의 작은 손이 오른쪽 허벅지 위에 살짝 놓여졌다. 뜨거운 열기가 허벅지를 통해 심장에 전달된다. 작은 손 위에 내 손을 가볍게 올려놓았다. 고물고물 만져지는 숙의 가여움이 그 자리에 있었다. 고개를 돌려 가볍게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 했다. 아득하게 뒤로 몸을 재끼며 의자 속으로 파 뭍혀버린다.




“자기야, 신사동으로 방향 돌릴 수 있어?”




“거긴 왜?”




“당신을 처음 만났던 일, 하나도 잊고 싶지 않거든. 처음 만난 그 자리에서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다시 느끼고 싶어.”




“알았어. 어차피 내일부터 휴가니까 그렇게 해도 되겠는걸.”




나는 양평으로 향하던 차를 적당한 공간에서 유턴하여 신사동을 향해 쏜살같이 내 달렸다.


하늘엔 수 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 박혀있다. 서늘한 바람도 점차 습하고 무더운 바람으로 바뀌는 듯 했다. 구름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는 듯도 했다. 마치 그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것처럼 비라도 억수로 쏟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달리다 보니 세상이 온통 그런 분위기를 위해 변해가고 있는 착각 속에 빠져 들었다.




“봐, 봐봐!!!”




“뭘?”




“창문에 빗방울 때리는거 안보여?”




순간 달리는 앞 창에 몇 방울의 물기가 눈에 띄었다. 정말 숙의 바램처럼 맑은 하늘에서 행운의 빗방울을 때려주려는가 보다 싶었다. 기특한 생각도 들었다. 속도를 내면서 점차 물방울들이 앞을 가려 시야가 좁아 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와이퍼로 한번 창문을 흝었다. 비가 많이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라디오를 틀고 기상예보를 들었지만 비 소식은 분명히 없었다. 한남대교 남단을 통해 우리가 처음 만났던 신사동 사거리에 도착했지만 구름한점 없다는 것이 옳을 정도로 하늘은 맑기만 했다.




신사동에는 많은 사람들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사거리 길가에 잠시 차를 세워두고 젊은이가 운영하는 찻집을 찾았다. 술취해 넋빠진 사람들은 아직 자리를 채우고 있지 않은 듯 다소 한가한 분위기였다. 




“박사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어, 잘 지냈나?”




“덕분에요.”




“집사람은 자리 잡았나?”




“카운터에 앉은 사람이 집 사람이에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카운터를 바라보니 아름답고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방황의 끝에 찾아온 안정이랄까 그 여자의 차분함을 읽을 수 있었다. 좀채로 활기차지 않던 젊은이의 몸에서 행복을 읽을 수가 있었다.




“커피 한잔과 오랜지 쥬스 좀 부탁하네.”




“이제 한시간도 채 안되면 엄청나게 밀려드는 술취한 손님들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걸랑요.


박사님이 시간 맞춰 들어오셨기 때문에 여유있는 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게 되었네요.”




“바쁜게 좋지. 부인이 안정을 찾아서 행복할테고.”




“박사님이 야단치며 훈계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잃을 뻔 했어요.”




“그랬군. 돌아온 사람을 보듬어 줄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인게야.”




“처음엔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니 잘한 것 같아요.”




“그래, 됐으니 자네 일 보게.”




젊은이의 갈등은 쉽게 해결된 듯 했다. 행복이란 고통이 선행된 뒤에 얻어지는 과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 끝에 불행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는 두가지 결과물은 대등한 것으로 앞뒤가 다소 바뀔 수는 있어도 가치가 다를 것은 없다는 생각이다. 젊은이에게는 부인의 가출 보다 더 힘든 일이 그러한 일을 용서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 용서를 통해 얻어질 행복을 계산하기 보다는 현재에 감당해야할 엄청난 스트레스를 회피하기 위해 우리는 너무 쉬운 결정을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눈 앞에 닥친 선택의 모호함을 분명하게 분별하고 그러한 고통이 비록 감내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극복할 때만이 진정한 행복을 맞볼 수 있다는 당연한 진리를 이 젊은이는 깨달은 것이다. 숙과 나는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신사동의 밤이 언제나 건전해 질 것인가 담소하고 있었다.




“어휴~, 맑은 하늘에 웬 소나기?”




술이 얼추 취한 사람들이 소나기를 피해 찻집으로 밀려 들어왔다. 차분한 분위기는 금세 어수선해 지며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앉을 만한 자리만 있으면 엉덩이부터 들이미는 사람들도 생기면서 이젠 찻집을 빠져나가야겠다 싶었다.




찻값을 계산하기 위해 카운터로 나왔을 때 얌전하던 젊은 여자가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어, 그래요. 잘 사세요.”




지갑에서 돈을 꺼내며 계산을 하려했지만 젊은이가 뛰어 나오며 계산을 하지 말라고 말렸다. 밀리듯이 찻집을 빠져 나오며 또 한쌍의 건강한 가족이 탄생했음을 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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