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광풍폭우(狂風暴雨) - 2부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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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수난시대




- 6 -




한 시간이 조금 덜 지나 인희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손가락 하나 들 힘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아랫도리가 갈라지는 느낌이 꼭 처녀를 상실할 당시 같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 동안 후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그녀가 잠들기 전과 같았다. 일어난 그녀가 후의 입에서 담배를 빼앗아 물었다. 붉은 조명 사이로 허연 담배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후는 그녀의 입에서 담배를 빼앗았다.




“내 앞에서 담배를 필 수 있는 여자는 우리 할머니뿐이야!”




후는 심각한 표정으로 루즈가 뭍은 담배를 기분 나쁜 듯 비벼 껐다. 등을 돌린 그가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잠시, 말도 안 되는 그의 논리에 당황하던 그녀였지만, 이내 생각을 고치며 화제를 바꿨다.




“알겠어요. 조심할게요. 후씨! 솔직히 얘기해 봐요. 처음 아니죠?”




그의 눈이 일순간 흔들렸지만, 고개를 돌리고 있어 인희가 눈치를 채지는 못했다.




“처음이야.”




후는 아예 반말 짓거리였다. 서로가 존대를 해야 했지만, 고지식한 그는 자신에게서 담배를 빼앗아 피우는 그녀가 창녀처럼 느껴져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자신의 여자에게는 존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경상도 촌놈기질도 한몫을 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인희는 자신보다 어린 그의 반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처음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나 죽는 줄 알았어요.”




“진짜 처음이야. 본능적인 거니까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




“그게 사실이라면… 나중엔 제가 감당하기 힘들어요.”




“계속 만날 생각이야? 난 좀 그렇다.”




“후씨, 제가 싫은가요?”




“그런 건 아냐. 좀 꺼림칙할 뿐이지. 너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있는 듯하고…….”




후는 매정했다. 만약 인희가 진짜 창녀였다 해도 후는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후가 잔인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녀보다는 연인들을 배신한 자신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자신에의 질책이 인희에게는 무시로 돌아갔다. 후가 인희를 떼어내려고 결심한 그 순간, 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는 인희에게 냉정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후는 필요할 때만 보이는, 냉철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하룻밤으로 끝내자는 그의 말이 인희에게는 너무 서운하게 들렸다. 후의 차가운 모습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보다 두 살이 많았고, 남자란 짐승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잠시 후, 그녀는 그의 눈에서 보았던 슬픔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왜 이런 차가운 모습인지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를 알 것도 같았다. 누가 자신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잘해주지만, 반대의 경우 무슨 짓이라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할 수 있는 이중적인 남자가 후였다. 그러나 그가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진정한 이유는 그의 따스함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보였다.


지금의 일도 따지고 보면 둘의 잘못 - 서로 즐기기 위해 만난 것이니 잘못이랄 것도 없는 - 이 그의 연인에게 피해가 갈 것을 최소화하려는 그의 노력이었다. 자신도 후에게 얽매일 수도 있으니, 어쩌면 그의 판단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의 눈에서 보이던 애잔함에, 그의 여인이 부러웠다. 자신도 그런 따스함을 느끼고 싶었다. 인희는 주변의 남자들을 돌아보았지만, 후만한 이는 없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후라는 남자의 존재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그녀는 후의 연인에게로의 미안함을 자신의 책임인양 뒤집어쓰고 싶었다. 대신 사과를 하고, 따귀라도 맞아주고 싶었다. 그의 옆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게 기우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희는 자신이 후에게 함락된 여인임을 알게 되었다. 방금 섹스에서도 그를 이기지 못했지만, 그의 정을 받아들이지 못함이 더욱 견디기 힘듦을 알았다. 잠깐의 만남이 당당하던 인희를 호랑이 앞의 강아지 꼴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지 말아요.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알만한 사인데, 왜 이러지? 여기서 접는 것이 좋을 듯한데……?”




“후씨가 여자친구 때문에 이런 다는 거, 저도 알아요. 많이 바라지도 않을 게요. 그냥 가끔씩 만나만 주면 안 돼요?”




“밤이 길면 꿈이 잦다는 건 너도 알 텐데?”




후는 그가 차갑게 나가면 인희가 떨어지리라 생각했었다. 그도 그의 냉정함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은 몰랐다. 다른 쪽은 몰라도 여자방면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그였고, 그런 면에서는 인희가 훨씬 노련했다.




“그럼, 제가 후씨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는 건 어떨까요?”




“뭘 가르친다는 거지?”




“여자에 대해서… 알려 드릴게요. 솔직히 남자를 많이 만나봤고, 많이 자봤어요. 그러니 저만한 선생님도 없을 거예요.”




“방금 내 밑에서 살려달라던 네가 어떻게 선생이 될 수 있겠어? 니가 없어도 그런 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여자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건 힘들어요. 그건 자신이 있나요?”




“그건…….”




후가 말꼬리를 흐리자 인희는 더욱 공격적이다.




“그리고, 침대위에서도 더 좋은 방법이 많아요. 그런 건 제가 아니면 힘들겠죠?”




“그렇… 겠지.”




“그리고 여자를 알아두면 나중에 도움이 되죠. 사회생활에서도 그렇고, 애인과의 사이에서도 훨씬 수월할 거구요. 예를 들어 선물을 고른다던지, 싸우게 되어도 이해하기 편하고, 애인을 후씨 맘대로 요리할 수 있잖아요.”




“끙…….”




후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내심 쾌재를 불렀지만, 내색을 한다면 산통이 다 깨진다. 그녀에게는 다된 밥을 그릇에 담기만 하면 되었다.




“어때요? 제 제안이?”




“그래……? 생각 좀 해보자.”




잠시 후가 생각을 하더니 말을 꺼냈다.




“그래, 그럼 니 뜻에 따를 게. 그리고 미리 말해둘 게 있는데… 나도 니가 처음은 아니다.”




“그 정도는 짐작했었어요. 이래 뵈도 선생님이니까요.”




“하지만, 니가 아는 여자 말고도 한명이 더 있다. 아마도 너랑 자주 만나기는 힘들 거야.”




인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여자도 나처럼 만난 여자인가요?”




“아니, 원래 여자친구의 친구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럴 수도 있을 거예요. 여자의 적(敵)은 여자라 그러잖아요.”




“문제는 둘 다 나와의 관계를 모른다는 거지.”




후는 궁금해 하는 인희를 위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해야 했다. 인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후가 설명을 마친 뒤, 몇 가지 질문이 오고갔다. 후는 자신의 고민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고, 인희는 그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인희가 느낀 것처럼 후는 따뜻한 남자였다. 후는 잘 생긴 것과는 거리가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를 만나게 된다면 그의 성정에 여인들이 빠져들 만도 했다. 그는 정이 깊었으며, 자신이 한 말을 목에 칼이 들어 와도 지키는 남자였다. 그의 두 여인들은 그의 그런 모습에 반한 것이었고, 인희도 그런 후에게서 그를 벗어날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변화가 당황스러웠지만, 그에게 끌리는 자신의 모습이 즐거웠다.


후가 일어서서 욕실로 향했다. 그녀는 그를 따라 들어갔다. 샤워기에서는 연신 찬물이 쏟아지고 있었고, 인희는 거품을 묻힌 수건으로 그의 몸을 정성껏 씻겨 주었다. 그녀의 손길에 그의 몸이 다시 뜨거워졌다. 그의 변화를 눈치 챈 인희가 그의 중심을 입에 물고 왕복운동을 했다. 후도 그녀의 가슴을 만졌다. 하지만, 후가 사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를 당해본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후도 그 정도의 기본 지식은 있었기에 인희의 머리를 떼어내고 말했다.




“인희야. 오늘은 여기에서 멈추자. 다시 하면 너 12시 전엔 못 들어간다.”




그녀의 정성을 아는 그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그래도 후씨가 좋아진다면 시간 따윈 괜찮아요.”




“말 들어.”




“예!”




샤워를 마친 후가 밖으로 나오자 인희는 그의 옷을 입혀 주었다. 그들은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인희는 후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내가 반말해서 기분 나빴지? 사과할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니가 선생님이니 내가 상관할 것은 아니지만, 내 욕심인 것 같아. 있던 일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오늘 이후로는 안 그랬으면 하는 바램이야.”




“알았어요. 난 선생이기 이전에 후씨 여자에요. 반말이건 뭐건 상관하지 않아요. 그리고 후씨가 원한다면 앞으로 후씨만 만날게요.”




“고마워요, 선생님~~!”




후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잡으려 농담을 던졌다.


사제지간(?)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가 뒤통수가 간지러워 돌아보니 그가 머물렀던 건너편 방의 문이 닫히고 있었다. 인희는 여관의 특성 상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후도 그런 인희를 보며 별 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머물던 동안 여관은 난리가 났었다는 사실을 그들만 모르고 있었다. 최소한 그들이 머물던 층 내에서는……. 인희는 거의 한 시간이 넘게 비명을 질렀었다. 후는 문외한인지라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못했고, 인희도 쾌락에 들떠 그런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렇지만, 같은 층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그들의 합창에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연인과 오붓한 정사를 즐기기 위해 온 여인이 아니라 쾌락을 위해 젊은 남자를 꼬여 일을 벌인 주만의 어머니 미정에게는 더욱 그랬다. 방금 건넌방에 머물렀던, 그를 틈새로 지켜본 사람은 미정이었다. 물론, 후가 그녀를 보진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집에서 한 번씩 무거운 것을 옮겨주던 그의 팔뚝을 예사롭게 쳐다보지 못 했던 그녀는 문틈 사이로 후가 보이자 일순 당황했었다. 그가 돌아설 때는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착한 과외선생이었다. 자신의 자식에게 더없이 잘 해주던…….




기숙사에 돌아간 후는 사감에게 신나게 깨졌다. 무단 외박에 점호불참. 후는 1학년 위원자리를 박탈당했다. 후도 사정을 했으나 후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사감은 결정을 철회하기 힘들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후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가 창밖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달빛에 그의 여인들, 순정과 순진의 얼굴이 분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미안하다.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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