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광풍폭우(狂風暴雨) - 4부 2장

본문

제 4 장 눈 깜빡일 순(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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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가 시작되자 후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월요일 오전은 후도 할일이 많았다. 우선 호출기의 번호를 바꿔야 했다. 그는 변경신청서를 작성하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인희를 놓아주기로 마음을 먹은 그는 스스로에게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다시 전화국에 들른 그는 전화신청을 했다. 삐삐를 확인하기 위해 5층까지 내려오기가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주소지가 서울로 바뀌었기 때문에 한 달 동안 미뤄왔던 세피아의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그는 지난 번 중고차 상회에 들러 차량 매매계약서를 쓰고 이전을 했다. 상회의 소개로 보험도 들었다. 이제 세피아는 법적으로도 완전하게 그의 소유물이 되었다. 그는 전화를 달자마자 순진에게만 번호를 알려주었다. 바뀐 삐삐번호는 소연 사람들과 고향에만 이야기를 했다. 전화 설치 때문에 오후수업을 재낀 그가 할 일은 주만과 주진의 과외뿐이었다.


과외로, 학교생활로, 두 여인의 남자로 돌아가자 그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눈에서 사라지면 마음에서도 사라진다했던가? 며칠 되지 않아 그는 소주 없이 잠들 수 있게 되었다.




후가 자취를 시작하자 그의 씀씀이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우선 인희를 만나지 않으니 그녀와 만나며 쓰던 만큼의 지출이 줄어들었다. 그 다음으로는 순 시스터즈들과의 여관비가 줄었다. 신혼방(?)이 생긴 순진과 후는 여관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옥탑방은 부근에 높은 건물이 없어 그녀가 마음 놓고 소리 지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들은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그들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순정과는 그의 세피아에서 주로 사랑을 나누었다. 순정의 집 앞에서 주차를 하던 후는 기가 막히게 다른 사람의 시선이 띄지 않는 후미진 구석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한쪽은 아파트 옆면을 보고 있고, 나머지는 아파트 담장이 높게 시선을 차단 시켜주는 명당자리였다. 게다가 나무넝쿨이 주변을 가리고 있어 다른 사람들이 주차를 꺼려하는 곳이었다. 순정은 신음소리가 작은 편이라 차문을 잠그면 차가 삐걱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그다지 큰 소음이 나지는 않았다.


그의 지출을 더욱 줄여준 것은 교통비였다. 그가 운전대를 잡게 되자 기름을 덜 먹는 그의 세피아는 택시비의 절반도 안 되는 기름값으로도 제 역할을 다했다. 순진의 어머니 또한 계속하여 그에게 반찬을 공수해 주는데다가, 그도 과외 때문에 술을 마시는 경우가 줄어 그런 것들로 여러 가지 세금을 내어도 많은 돈이 남게 되었다.


이래저래 줄어든 지출은 순진의 은행대출을 갚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의 집에서 매달 올라오는 용돈과 그의 수입을 합하면, 거의 200만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거기에서 그가 쓰는 돈을 제외하더라도 매달 150만원 정도가 남았고, 그것을 바로 대출통장에 집어넣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예정보다 빨리 대출금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아지자 후는 마음이 편해졌다.




수능을 일주일 앞둔 금요일 저녁, 그는 자신의 자취방에서 순영의 선생님이 되어있었다. 후의 옥탑방은 순영의 학교와 집의 중간 지점이었기 때문에 하교를 하면서 들러 과외를 받기로 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쁜 후에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순진의 배려이었다.




“처제. 형부가 시킨 것 잘 되어가?”




그는 순영을 농담 삼아 한 번씩 처제라고 불렀다. 순영은 - 후와 순진은 모를 테지만 - 후와 순진이 키스를 하던 것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들이 연인 사이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집에서도 순진이 후를 남자친구라고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순진의 말투나 행동에서 그냥 친구사이는 아닌 것을 눈치 채고 있었고, 후 또한 성실한 과외선생이며 착한 학생임을 아는지라 후를 장래의 사윗감으로 점찍어 두고 있는 상태였다. 순영은 장래의 형부가 될지도 모르는 그의 농담을 능청스레 받아 넘겼다.




“예, 형부우~~!! 이제 세 자리까진 암산으로 가감승제(加減乘除)가 되는 정도에요. 빡빡이도 매일 하구요. 근데 이런 방식이 잘 먹혀들어요? 형부가 하라 그러니깐 하긴 하는데, 친구들이 막 놀려요. 손도 아프구…….”




“처제는 원체 똑똑한 편이라 다른 방식보다는 이 방식이 나을 거야. 언어나 외국어의 경우는 언니가 잘 하니까 나도 걱정은 안 하지만, 수리1, 2는 그냥 내 방식을 따라줘. 아무리 함수니, 수열이니 해도 수학이란 게 원래 가감승제, 이 네 가지를 벗어나진 않아.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수능은 시간이 많이 남아야 점수가 오르는 스타일이야. 나도 모의고사 칠 때에 시간이 많이 남는 날 성적이 좋았거든. 지금은 순영이가 세 자리 정도 수준이지만, 연습하면 대여섯 자리 숫자도 1초 안에 처리할 수 있을 거야. 이걸 연습시키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두뇌의 처리속도 향상을 위해서야. 수리1, 서른 문제를 풀다보면 계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줄여주는 데다가, 어려운 수열 문제나, 함수문제에 맞닥뜨리게 되면 노가다로 풀어야할 경우도 생기는 데 그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거야. 물론 그것도 처제가 공식을 대입해서 풀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말이야. 또, 처리속도가 빨라지면 다른 과목에도 시간이 많이 남을 거야. 쉽게 말해서 아주 기초적인 것이지만, 숙달되면 엄청나게 속도가 붙을 거야. 나도 아직까진 다섯 자리는 5초 정도 걸려. 못 믿겠으면 테스트 한번 해볼까?”




후는 못미더워하는 순영에게 계산기를 들게 했고, 숫자를 불러보라 했다. 순영은 네 자리의 숫자끼리의 가감승제를 물었다. 후는 2초도 안되어 대답을 했고, 그것은 계산기의 그것과 일치했다. 다시 순영은 다섯 자리의 계산을 물었으나 후는 5초도 안되어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후는 놀란 눈을 한 순영을 놔두고 수도학원 1층에서 가져온 수리1 모의고사 시험지를 꺼내들었다. 한 장씩 시험지를 나눠든 그들은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후는 한 시간도 안 되어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가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고 음료수를 잔에 따라왔을 때까지도 순영은 문제를 풀고 있었다. 잠시 후 순영이 문제를 다 풀자 후는 그것을 채점하기 시작했다. 순영의 문제지는 온갖 계산식으로 가득했지만, 후의 시험지는 몇 가지 낙서를 제외하곤 깨끗한 편이었다. 순영은 57점이 나왔고, 후는 71점이 나왔다. 순영은 음료수를 마시면서도 결과에 놀라고 있었다.




“방금 봤겠지만 난 지금 다섯 자리까지 암산이 가능해. 그리고 처제한테 가르쳐주진 않았지만, 약간의 통박도 있어. 그건 내가 나중에 가르쳐 줄 테니까, 아직까지는 내가 하라는 것만 열심히 하도록 해. 언젠가는 나보다 빨라질 거야.”




후는 자신의 풀이방식과 그녀의 방식을 대조해가며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후는 문제를 풀 때 계산식을 이용하는 방식보다 잔머리를 쓰는 방식을 좋아했다. 그리고 통박을 굴릴 때 그의 잔머리는 극에 달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공식을 대입하여 풀이한다면 몇 분이 걸릴 문제들을 그는 30초도 되지 않아 답을 내는 것이었다.




“문제를 풀 때 꼭 끝까지 풀어야할 이유는 없어. 여기 8번 문제의 경우가 그래. 문제만 읽고 바로 풀이하려고 들지 말고, 지문부터 살펴보라구. 답은 마이너스가 나와야 되지? 근데 두 개가 플러스잖아? 그러니 2, 4번은 제외시키고……. 그리고 이 함수는 그 구간에서 절대 절대값 5를 넘길 수 없어. 그러면 1,3번이 또 제외. 그럼 답은 5번이 나오지. 어때? 간단하지? 수능에선 이런 문제들이 많이 나와.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문제를 잘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해. 가끔 잔머리를 쓸 수 없는 문제들이 나오긴 하지만 그럴 때는 어려운 문제들은 젖혀두고 뒤에 것부터 풀어. 괜히 어려운 문제를 잡고 시간 허비하다간 쉬운 문제 풀 시간을 뺐기거든.”




“형부,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나도 좀 가르쳐줘요, 네?”




“처제니까 안 가르쳐 줄 수도 없구. 어쩌냐? 이게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 좋아, 하나뿐인 처제한테 못 가르칠 것도 없지. 실은 내가 좀 게으른 편이라서 문제를 풀다보면 빨리 푸는 방식을 찾는 걸 좋아하거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어차피 성적표에 찍히는 점수가 중요하지, 주관식이 아닌 다음에야 풀이과정이 뭐가 중요해? 괜히 어려운 공식을 외우는 것보다 공식의 요점이랑 목적을 파악하는 거지. 공식을 몰라도 쓰이는 데만 알면 쉬운 거야. 자, 그러니까 이런 문제는 이런 식으로, 요건 요런 식으로……. 어때? 이해돼?”




“아~~!! 정말……. 이런 방식이 있었네? 근데 방금 말하던 그 통박도 좀 가르쳐 줘요. 네~~ 형부~~!”




순영이 후의 팔을 끌어당기며 매달린다. 그 때였다. 방문이 열리며 순진이 들어왔다. 순진은 순영이 후의 팔을 가슴에 끌어당기는 것을 보며 눈에 불이 튀었다. 후도 조금은 부끄러운 느낌이 들어 순영의 팔을 가만히 뿌리치며 순진을 맞았다.




“순진이 왔어?”




“얘가 공부하라고 보냈더니, 또 후를 괴롭히고 있어? 후, 너도 애가 놀자구 그래도 혼을 내주진 않고…….”




순진은 짐짓 하난 듯 말했지만, 순영은 눈 하나 껌뻑 하지 않고 다시 후에게 매달렸다.




“언니도 참……. 지금 질투하는 거니? 언니는 사위 사랑은 장모고, 처제 사랑은 형부란 말도 몰라? 그죠, 형부~~?”




“어……. 그래.”




“찰싹~~!!”




“얼른 떨어져~! 참, 늬들 아직 저녁 전이지?”




후는 맞은 등짝을 주무르며 대답했다.




“응, 그러고 보니 아직 밥도 못 먹었네.”




“기다려 밥 해줄 테니……. 얼른 남은 공부나 해. 근데, 이 기집애가 아직도 안 떨어지네? 얼른 안 떨어져~~?”




“언니는 괜히 나만 가지구 그래. 형부, 저 기집애 못됐다. 그죠?”




순영이 후의 귀에다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으나, 순진은 이미 그것을 들은 듯하다.




“야~~!! 이순영! 너 죽을래?”




“알았어. 알았어. 떨어지면 되잖아? 형부, 방금 그거나 얼른 가르쳐 줘요.”




후가 다시 설명을 시작하자 순진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동생에게까지 질투를 느낀 자신이 조금 우습기도 하였으나, 그녀는 후를 믿었고 동생을 믿었다. 잠시 후, 두 자매는 후와 함께 저녁을 먹었고, 그가 태워주는 차를 타고 집 앞에 도착했다. 순영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한마디 한다.




“형부, 나 먼저 들어갈게요. 내가 있으면 둘이 뽀뽀도 못하잖아요. 히힛~~!!”




“얘가 지금 뭔 말을 하는 거야? 조용히 못해?”




“아이 참……. 내가 어린 앤 줄 알아? 나도 두 사람 뽀뽀하는 거 첨부터 다 봤어. 속일 사람을 속여라. 그럼 나 들어간다. 형부 잘 해봐요.”




순영은 두 사람에게 눈을 찡긋하며 문 뒤로 사라졌다.




“저 기지배가 못 된 것만 알아가지구……. 읍~~!!”




“뭐 틀린 말도 아니잖아…….”




후는 투덜거리는 순진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었다. 한참을 붙어 있던 그들이 떨어지자, 순진이 그에게 안겨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하긴……. 자기야, 늦겠다. 얼른 가봐야지.”




“응, 그래. 그럼 내일 봐.”




“쪽쪽~~!! 잘 가.”




그가 다시 운전석으로 다가가 문을 열 때였다.




“나는 봤데요, 나는 봤데요~~!! 자기야, 늦겠다. 얼른 가~~~ 요~~!! 쪽쪽~~!!”




문 밖으로 순영이 고개만 내밀고 입술을 징그럽게 내밀며 순진의 말투를 따라하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후는 얼른 차에 올라탔다.




“야~~!! 이순영~~!! 너 정말~~!!”




“메롱이다. 뭐 틀린 말도 아니잖아. 응, 그래. 내일 봐~~!! 아유~~ 느끼해.”




“너 일루 안 와? 잡히면 죽었어.”




“엄마~~! 순진이 좀 봐. 방금 후 오빠랑 뽀…… 아얏~~!”




후는 미소를 지으며 기어를 넣고 순정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순 시스터즈들에겐 서로의 과외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말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혹시나 그와의 관계가 들통 날 것을 걱정해 미리 원천봉쇄한 것이었다. 열 시가 조금 지난 시각 후는 민철의 선생님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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