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광풍폭우(狂風暴雨) - 5부 8장

본문

제 5 장 젊은 남자




- 8 -




여자들의 관심을 유발시키는 남자들의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것은 돈이나 권력, 외모, 학벌, 화려한 언변 등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남자의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어딘가 지쳐 보이고, 외로워 보이고, 젖어 있는 듯한… 그러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이런 분위기는 한 순간에 여자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파고들고, 한 번 박힌 비수는 낚시 바늘처럼 쉽사리 빼지지 않는다. 설혹 빠진다 하더라도 깊은 생채기를 남기는 것이다. 지금 후의 분위기는 그런 것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분위기가 한 여자의 가슴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자기 일에만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미지는 그런 그의 성실한 모습에 또다시 가슴이 흔들린다.




후가 일보작성을 마쳤을 때, 겨울 해는 이미 서산을 넘어가 있었다. 바로 어제가 일년 중 해가 가장 짧다는 동지인지라 후가 퇴근을 위해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임시로 설치한 백열등만이 현장을 밝히고 있었다. 동절기라 인부들은 다섯 시 반에 모두 퇴근을 해버린 현장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사무실 직원들은 각자의 차를 타고 뿔뿔이 사라졌고 후는 철환과 함께 세피아에 올랐다.




“그래, 오늘 일 해보니 어떻던가?”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매던 철환이 말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나중에 졸업해서도 큰 도움이 되겠던데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안 그래도 천 주임 얘기를 들어보니 보기보단 이해가 빠르다고 하더군. 우리 열심히 해 보세나.”




돌아오는 길 내내 철환은 후를 사위 보듯 대했지만, 후에게는 그의 그런 관심이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순진과 헤어진 것을 말하기가 곤란한 후는 적절히 둘러대며 철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피아가 집 앞에 서자 철환은 내일부터는 자신의 차로 출근을 한다며 현장으로 바로 출근을 하라고 말하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후는 주만의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 후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은 두 여인이 그의 잘못을 알고도 그의 여인으로 남으려고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공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기에, 그녀들의 그런 선택은 믿기 어려웠다. 그에 대한 그녀들의 사랑은 그로서도 행복한 것이었지만, 친구와 함께 한 남자를 사랑하며 공유(共有)한다는 것은 그의 견해로는 미친 짓이었고, 선택을 받은 남자도 해서는 안 될 플레이였다. 후는 언젠가 선배가 말하던 사랑과 우정의 공식을 떠올렸다. 순결은 백색(白色)이라 때 묻기 쉽고, 사랑은 분홍색이라 변색(變色)되기 쉬우며, 우정은 무색(無色)이라 변하지 않는다는 그 내용에 따르자면, 시스터즈의 사랑은 분홍색이 너무도 강렬해 무색을 채워버린 것이었다. 후는 인희에게 들었던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도 기억이 났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남자는 우정과 사랑의 갈림길에서 우정을 택하지만, 여자는 사랑을 택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남자와 여자가 있겠지만, 대다수는 그렇게 된다고 했다.




‘어머, 후씨! 이해가 안 돼요? 그럼 제가 예를 들어볼게요. 친구들이랑 만나고 있는데 애인의 연락이 온다면, 남자들은 대개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 여자친구를 불러요. 그치만 여자는 친구들과 헤어지고 남자친구를 만나러가요. 남자는 친구와 애인을 함께 만나도, 여자는 애인만 만나요. 남자는 애인이 생겨도 친구를 잃지 않지만, 여자는 애인이 생기면 친구를 잃는다는 말 몰라요? 그쵸? 그런 말은 들어봤죠?


그럼 좀 더 극단적인 예를 들어볼게요. 가장 친한 친구의 여자친구가 자신의 이상형이다. 어떨 것 같아요? 솔로인 친구는 아무리 여자가 자신의 이상형이라도 그냥 친구와 똑같이 대할 거예요. 만약에 솔로인 그 친구가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해도 남자들은 우정을 배신하지 않더군요. 그건 애인과 깊은 관계라 해도 그렇더라구요. 애인이 있는 친구는 애인을 통해 괜찮은 여자를 소개시켜 주기도 하고, 친구를 달래기도 해요. 심지어는 애인과 헤어지는 남자들도 더러 있지만, 친구와 애인 때문에 다투지는 않아요.


여자들은 어떨 것 같아요? 보통 그런 상황이 닥치면 여자들은 둘 중의 하나에요. 그건 남자들과 똑같아요. 포기하거나 반대이거나……. 반대의 경우에는 여자들은 난리가 나죠. 친구의 애인을 뺏는 경우도 있고, 그 때문에 사이가 멀어지기도 해요. 그런데 더 문제는 남자들이에요. 남자들 중에는 그런 상황을 즐기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렇게 되면 두 여자는 모두 상처만 받을 뿐이에요.’




후는 인희의 말을 떠올리며 자신도 그녀가 말한 나쁜 남자라는 사실이 가슴이 아팠다. 두 여인과 관계를 시작할 때부터 자신이 나쁜 놈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었지만, 막상 그녀들을 보내고 나자 자신이 둘 사이를 즐겼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더욱 괴로웠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녀들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스스로를 자위했다. 그가 자신의 선택이 세 사람 모두를 위해 적절한 것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을 때 그의 세피아는 주만의 집 앞 골목을 지나고 있었다.


그가 초인종을 누르고 대문을 들어서자 미정이 남편을 기다리는 신혼주부처럼 반갑게 그를 맞았다. 후는 자꾸 몸을 밀착시켜 오는 미정을 겨우 밀어내며 주만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았을 것이라 착각하고 개기는 주만에게 이단 옆차기와 뒤통수치기로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고 나자 시계는 열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옆에서 졸고 있던 주진을 깨워 방으로 보낸 후가 대문을 나와 세피아의 시동을 걸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자 혼자 남게 되자 좀 전에 주만의 집으로 올 때보다 더욱 소외된 감정을 느끼는 후였다. 자취방 앞의 골목에 주차를 한 뒤 문을 걸어 잠근 그가 뭔가가 생각이 난 듯 뒷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커다란 샤워용 수건이 있었다. 이 수건은 언젠가 순정과 그녀의 아파트 구석에서 섹스를 할 때 행여나 있을 주위의 시선차단용이었고, 휴지가 떨어졌을 때 대용으로 쓰던 것이었다. 그것을 집은 순간 가슴에 새겨진 상처가 그를 짓눌러 후의 숨이 가빠왔다. 하루 전의 이별은 배에 남겨진 아홉 바늘의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그에게 남겼다. 수건을 세탁기에 던져놓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 후의 눈에 가장 먼저 뜨인 것은 그의 이불이었다. 그 위에는 순진과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물이 많던 그녀의 체액은 이제 삶아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사람이 이별을 하고 나면 사소한 물건에 남은 추억이 가슴을 예리하게 파고든다는 것을 그때서야 후는 알게 되었다. 후는 흔들리는 마음을 정리하고 방안에 시스터즈를 생각나게 할만한 물건들을 모두 치워버렸다. 차마 휴지통에 넣기에는 그의 마음이 너무 여렸다. 가게에서 가져온 박스 하나에다 그것을 몽땅 집어넣고 눈에 잘 띠지 않는 싱크대 구석에 쳐 박아 넣었다. 방에 혼자 남기가 힘들어진 그가 담배를 물고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 동대문에는 모레 있을 크리스마스를 위한 트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내다시피한 그는 전날보다 빠른 6시를 약간 넘긴 시간에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 모퉁이에 마련된 주차장에는 전날 보았던 김 주임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후는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려 그 차로 다가갔다. 그러자 김 주임의 차가 갑자기 흔들리더니 김 주임이 급하게 차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천 기사, 일찍 왔네?”




“네, 그냥 눈이 일찍 떠져서요.”




“추운데 여기 있지 말고 사무실로 들어가지?”




김 주임은 어깨를 감싸며 사무실로 끌고 갔다. 그는 어딘가 쫒기는 사람처럼 후를 재촉하는 것이 같았다. 후가 곁눈질로 차안을 쳐다보니 뒷좌석의 진 대리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제 퇴근길에도 진대리가 김 주임의 차에 올랐던 것을 기억해낸 후는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미소를 지으며 김 주임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고, 잠시 후 사무실에는 진 대리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좋은 아침~~!!”




후는 방금 자신과 눈을 마주쳤던 그녀가 저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오자 내심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도 대충 눈치가 있어 웃는 얼굴로 화답을 했다. 그러자 진 대리는 그에게 고맙다는 듯 살짝 윙크를 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사무실 직원들이 모두 출근을 하자 전날처럼 철환은 작업 지시를 내렸다. 철환은 후를 불렀다.




“이봐, 천 기사!”




현장 내에서는 ‘천 군’이라는 호칭보다는 그것이 나은지 다들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네, 소장님.”




“오늘은 나랑 같이 다녀보자구. 어제 천 주임이랑 김 주임에게 잘 배웠지? 난 오늘 곁에서 지켜보기만 할 테니까 어디 혼자 한 번 해보라구. 어디 105동부터 가볼까?”




후는 그 말을 듣고 약간은 당황했지만, 오늘은 철환이 뒤를 받쳐준다고 생각하자 약간 안심이 되어 자신 있게 대답하고 앞장서서 105동 작업장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그의 일과는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꼼꼼하게 작업사항을 체크하고 일보에 적을 작업내용을 메모했다. 철환은 옆에서 지켜보며 후가 실수한 부분을 지적하고 검토해 주었지만, 그런 것도 몇 번에 불과해 후가 일을 빨리 배운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후는 다시 사무실에 돌아올 수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설 때 그는 두 개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는 아침에 자신의 치부를 들킨 진 대리의 것이었고, 나머지는 여경리 미지의 것이었다. 그는 멋쩍은 미소로 그녀들에게 보이고는 일보 작성에 열을 올렸다. 일과를 마치자 사무실 직원들이 철환에게 후의 환영식을 하지 않느냐고 말을 꺼냈지만, 오늘은 후가 과외가 있으니, 과외가 없는 내일 회식을 하기로 했다.




후는 현장을 나와서 순영의 학교로 향했다. 히터로 눅눅해진 차안을 환기도 시킬 겸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순영이 멀리서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순영이 차에 오르자 후는 기어를 넣고 자신의 자취방으로 차를 몰았다. 순영은 아무 말이 없는 후에게 이상한 낌새를 느꼈지만, 자신의 과외가 끝날 때까지는 거기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춘기 여고생의 호기심이 만만한 것이던가?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후에게 질문을 했다.




“형부~! 요새 언니랑 무슨 일 있어요? 언니가 요즘은 계속 울기만 해요. 그제는 친구랑 거의 떡이 되어서 들어와선 둘 다 마당에 쓰러져 자고 있는 것을 엄마랑 나랑 방으로 옮겼다니까요.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죠?”




후는 내년이면 고3이 되는 순영에게까지 그런 일로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은……? 그냥 내가 심하게 다친 게 걱정 되서 그랬겠지……. 순영인 신경 쓰지 말고 공부에만 전념해. 언니도 곧 괜찮아질 거야. 내가 이렇게 다 나았으니 이제 언니도 술 마시고 울고 그러진 않을 거야. 자, 다 왔다. 그럼 금요일 날 봐!”




말은 그렇게 하지만 후의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후가 그 말을 하고 입을 다물자 순영은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려 집으로 향한다.




‘분명 뭔가가 있어. 오늘도 내게 한 번도 처제라고 부른 적이 없잖아? 혹시……?’




순영은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의 세피아는 이미 골목언저리를 지나 사라지고 없었다.




후는 집으로 돌아가려다 말고 기숙사로 차를 돌렸다. 항상 자신이 주차를 하던 곳에 차를 대고 기숙사 정문을 바라봤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후는 인희가 며칠 전까지도 후를 기다렸다는 순정의 말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인희도 이제는 포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는 차에 올라타면서 또 다시 기분이 상했다. 인희에게는 그리 해준 것도 없으면서 자신이 힘들 때만 찾는다는 사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후의 차가 네온 불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에선 인희가 전봇대 뒤에 숨어 사라지는 그의 세피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는 울음 섞인 독백이 흘러나왔다.




“후씨~! 고마워요. 그래도 날 잊지는 않았군요. 나 그것만으로 만족할게요. 이제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게요. 나 꿋꿋하게 살 거예요.”




인희는 후가 방을 옮긴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기숙사 앞에서 그를 기다려왔었다. 물론 그녀도 그의 방까지 찾아가 그를 만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후에게도 부담이 될 것이었고, 이왕 내팽개쳐진 자존심이었지만 그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남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를 기다려왔었고, 이제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인희는 택시를 타고 그의 자취방 앞으로 갔다. 그가 힘겨운 발걸음을 떼어 계단 뒤로 사라지자 그녀는 다시 집으로 택시를 돌렸다.




‘잘 가요. 내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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