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험담

박 차장 - 4부 4장

본문

박 차장 4-4






멀리 바다가 바라보이는 산 기슭에 하얀 상복을 입은 두 여자가 서 있다.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두 여자의 머리카락을 뒤로 날리고 있었다. 꼿꼿하게 아버지의 죽음을 참던 고 대리도 아버지의 시신을 담은 관이 철문이 열리며 시뻘건 불길이 이글거리는 화장로 안으로 들어가고 철문이 서서히 내려질 때는 몰려드는 슬픔과 서러움에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죽음은 잠시나마 삶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할 수 있도록 한다. 하긴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의 목표점은 바로 죽음인지도 모른다. 인생에 많은 굴곡들과 사연들이 있지만 모든 인간의 종점은 똑 같은 죽음인 것을. 




고 대리와 인숙은 아버지의 재가 담겨져 있는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어서는 조심스럽게 재를 손에 담았다. 마치, 잿가루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면 안된다는 듯이…




두 자매는 손에 담긴 재를 하늘 높이 뿌렸다. 가능하면 아버지가 하늘 가까이 날도록…




“아버지, 죽어서는 좋은 데로 가세요. 엄마도 만나시고요. 나중에 저희들하고도 다시 만나요…”




재를 다 뿌린 뒤에도 두 자매는 그 자리에서 한 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멀리서 두 자매를 바라만 보고 있던 장우가 그들에게 닥아갔다.




“고 대리님, 이제 그만 내려가요. 바람이 무척 차요. 동생 걱정도 해야지.”




“네…이제 그만 내려가요. 아버지도 이제 여길 떠나셨을거에요.”




장우는 두 자매를 데리고는 산을 내려왔다. 고 대리의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선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동해시에서 꽤 떨어진 조그만 마을에 있는 고 대리의 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안주인이 오랫 동안 없었던 집. 자신의 아내를 잃은 후 술과 노름, 그리고 인생을 한탄하다고 죽어간 바깥주인이 살던 집은 주인들의 삶이 비참했던 만큼 초라하고 비참하게 보였다.




“고 대리, 이번 한 주는 여기서 지내도록 하는게 좋겠어. 아마, 정리할 것도 많을 것 같고. 그리고,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까 동생도 서울로 불러서 고 대리랑 같이 사는게 좋을 것 같아. 마침, 동생이 간호전문대를 나왔다고 하니까 내가 기훈이한테 동생이 일할 만한 병원을 알아보도록 할게.”




“네…차장님. 그런데, 지금 인숙이랑 같이 들어갈 집이 없어요. 아버지 병원비 붙이느라고 제가 있던 방을 뺏거든요.”




“그랬었어? 그럼 내가 서울 변두리에 작은 아파트를 알아볼게. 요샌 월세도 많으니까. 아마, 고 대리 월급이면 충분히 얻을 수 있을거야. 지금은 어디 있지?”




“사실은 일주일 전에 방을 빼고…신림동에 있는 고시원으로 들어갔어요.”




“그럼, 고시원 열쇠를 줘. 내가 짐을 뺄게.”




장우와 정 대리, 육 대리는 두 자매를 남겨놓고 서울로 가기 위해 각 자의 차에 몸을 실었다. 육 대리가 계속 안 대리에게 전화를 했지만 안 대리와는 연락이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안 대리는 끝내 장례식에 나타나지 못했다. 아마도 장우와 정 대리, 그리고 육 대리는 내일 아침이면 쾌활한 목소리로 씩씩하게 사무실을 들어서는 안 대리에게 고 대리의 슬픔을 전할 것이다. 안 대리는 또 얼마나 슬퍼할 것이며 어려울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한 고 대리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릴까.




그렇게 일요일이 가고 월요일을 맞았다. 안 대리는 고 대리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는 한 동안 자신의 책상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안 대리는 천천히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저, 보영입니다.”




“…”




“아버지랑 다른 곳에 있었어요. 장례식에 가보지 못해서 죄송해요.”




“…”




“저 지금 고 대리님에게 내려가고 싶어요.”




“…”




“하지만…”




“…”




“알겠어요. 고 대리님이 편하신데로 할께요.”




“…”




“그럼, 건강 조심하시고 다음 주에 뵈요.”




“왜? 고 대리님이 오지 말래?”




“네, 동생하고 단 둘이 있고 싶다고…”




“그럴거야, 이럴 때는 잠시 놔두는 것도 좋아. 고 대리님이 서울로 올라오면 그때 다시 위로해줘도 돼.”




“왜, 하필…”




“얌마, 내가 너 한테 얼마나 전화 돌려댔는지 아냐? 너 어디 있었는데 전화도 안돼냐?”




“아버지가 갑자기 일본을 가자고 해서…가족들이랑 주말에 일본에 가 있었어요.”




“너랑 고 대리도 참 운대가 안 맞나보다. 하필이면 뜸금없이 일본이냐?”




“그래, 안 대리, 육 대리 말 처럼 나중에 고 대리가 오면 그때 위로해주자고. 사실은 거기 간 우리도 고 대리랑 많은 애기 할 틈이 없었어. 고 대리도 지금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굉장히 피곤할거야. 우리 할 일이 많아. 다음 주에 고 대리 오면 깜짝 놀랄만큼 일을 해 놓자고.”




장우는 팀원들에게 고 대리가 정리한 구매 신청자 리스트와 정 대리가 작성한 결혼이벤트 회사의 참가 신청자 리스트를 배포했다.




“우리가 초대할 고객은 300명이야. 240명은 이번에 구매한 신청자 가운데서 선정할거고, 나머지 60명은 결혼이벤트회사에서 낸 참가 신청자들 가운데서 뽑을거고. 나하고 육 대리는 참가자를 고를 테니까. 안 대리는 호텔로 가서 이벤트 계획을 확정해. 오늘은 일단 큰 스케쥴만 확정하고 세부 스케쥴은 이번 주 계속 준비하도록 해. 그리고 정 대리는 모델들 섭외하고 패션쇼 순서랑 컨텐츠를 이번 주 중에 끝내줘야겠어. 이제 한달 남았어. 이번 주 중에 모든 준비 마치고, 개별 완성 단계로 들어간다. 모두 나가봐.”




“그런데, 차장님. 모델들도 모델들이지만 패션쇼 중에 섹시언더웨어 테마 댄스도 넣기로 했쟎아요. 사실은 오늘 댄스팀 선정하게 되어 있는데 그건 차장님하고 같이 보고 결정하면 좋겠어요.”




“그럼, 나랑 같이 가보도록 하지. 육 대리가 그럼 구매 신청자 중에서 구매 물량 순으로 참가자를 선정해 놓고 있어. 나는 정 대리랑 댄스팀 선정하고 올 테니까.”






“박 상무님, 어떻게 된 겁니까? 영업부에선 새로운 제품 개발이 늦다고 야단인데”




“죄송합니다.”




“죄송하단만 들을려고 그러는게 아닙니다.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게 저희가 드링크류만 만들어서 팔다가 치료제를 시장에 출시하려다 보니…경험이 부족해서.”




“무슨 말 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새로운 약을 개발해서 팔자는 것도 아니고 외국에서 이미 나오는 약을 라이센스 제조해서 판매하겠다는건데.”




“그게…그 쪽에서 제조 방법도 다 받았지만…그대로 해도 제대로 약이 안 만들어져서.”




“아니, 연구소 놈들은 월급 받아쳐먹고 도대체 뭘 한다는거에요? 능력이 안되는 놈들은 목아지를 쳐요. 2개월 뒤면 이사회가 열린단 말이요. 당신도 이번 결산이 나 한테 얼마나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거 아니요?”




“여부가 있습니까. 빨랑 나오도록 조지겠습니다.”




“박 상무도 이번 결과에 따라 목이 제 자리에 붙어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날거요. 알아서 해요. 나가봐요.”




박 상무는 조인봉 사장에게 허리를 구십도로 꺽어 인사하며 사장실을 나갔다.




박 상무가 사장실을 떠나자 조인봉은 전화기를 어딘가로 돌렸다.




“그래, 그 쪽 소식은 알아봤나?”




“…”




“그래, 그 쪽도 개발 업무가 지 마음처럼 되지는 않을거야. 다른 쪽은?”




“…”




“영업 3팀이란 말이지. 누가 책임잔데?”




“…”




“그럼, 그 녀석이 당분간 일을 볼 수 없게 손을 써봐.”




“…”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해.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은거니까.”




“…”




“그래, 내가 자네 섭섭하게 하겠는가? 좋은 소식 기다리겠네.”








“젊은 놈이 건방지게…”




박 상무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자 마자 결재철을 소파위로 내동댕이쳤다.




“상무님.”




“뭐야?”




“저…**언더웨어의 관리부장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언더웨어의 관리부장이? 돌려봐.”






“여보세요. 나 박광택이요.”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상무님. 저 **언더웨어의 권태기 입니다.”




“아…권 부장이 웬 일로.”




“문안 인사 드린 겁니다. 상무님이야 ** 그룹에서 누구나 존경하는 분 아닙니까?”




“어흠… 이 사람이…”




“상무님, **제약에서 그대로 잘 계시지요?”




“잘 있기는 뭐, 알지도 못하고 설치는 놈 때문에 이 몸이 고달퍼. 그나마 내가 있어서 **제약이 그대로 버티는거지 말이야.”




“그럼요. 그럼요. 상무님 같이 탁월하신 분이 계셔서 **가 계속 버티는거지요. 저희 사장님도 상무님 같은 분만 저희 언더웨어 쪽에 있어도 걱정 하나도 않하겠다고…아쉬움이 큼니다.”




“**언더웨어 사장, 조인숙 사장이?”




“그럼요. 괜챦으시면 내일 제가 자리를 마련해 볼까요?”




“누구랑? 조인숙 사장이랑?”




“네, 저희 사장님도 상무님한테서 사업에 필요한 좋은 말씀 들으시기를 얼마나 바라시는데요.”




“그래? 으흠. 뭐 **를 위하는 일인데. 내가 그런거 못할려고. 내일 스케줄이 꽉 잡혀 있지만 저녁에 시간을 내겠네.”




“그럼, 내일 저녁 7시에 빌란다 호텔, 빌라노 식당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음. 알았네. 조인숙 사장님께도 안부 전해 주고.”




“그럼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박 상무는 다운되었던 기분이 당장 업됐다. 가뜩이나 젊은 사장으로부터 쓸모 없는 늙은이로 취급 받는 중에, **의 다음 상속자가 될지도 모르는 조인숙 사장이 자신을 존경하고 있다니. 조심스럽게 두 개의 줄을 탈 수만 있다면…




“상무님, 인삼차 입니다.”




“그래.”




박 상무는 탁자에 인삼차를 놓는 미쓰 김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상무님…저 제 방에 제 동생이 있어요. 오늘은…”




“누구? 동생? 아. 전에 잠깐 알바로 써도 되겠냐는 동생?”




“네.”




박 상무는 열려진 문 사이로 상무실 밖을 보았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 하나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 일은 뭘 시키고 있나?”




“네, 지원본부 결재 서류 정리하고 컴퓨터에 입력하는 걸 하고 있습니다.”




“알았어. 나가봐.”




기름진 박 상무의 입가에 순간 걸쭉한 미소가 돌았다. 박 상무가 다시 전화를 들었다.




“양 사장? 나 박광택이요.”




“…”




“아주 조그만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




“어허…이 사람, 다른 사람이 잘못 들으면 내가 자네한테 항상 용돈 타는 줄 알겠네.”




“…”




“내가 우리 직원 하나를 오후에 보낼 테니까 말이야. 자네 회사에서 납품하는 판촉물 견본을 보여주게. 아주 자세히 알려줘야 하네. 만일 9시 이전에 다시 회사로 돌아온다면, 자네 설명이 불충분했던 걸로 알겠네. 곧 구정이 닥아오니까 말이야. 판촉물을 어느 회사에서 구입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거든.”




“…”




“그래, 잘 해보게나.”




“미쓰 김, 잠깐 들어와 보도록 해요.”




“상무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방금 신우상사의 신 사장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말이지. 이번 구정 때, **에 꼭 추천하고 싶은 판촉물이 있다는군. 귀챦은데 꼭 ** 사람을 보내달라고 해서 말이야. 신 사장이 때 되면 꼭 뭘 보내주는 사람이어서 안 찾아볼 수도 없고…저번 신정 때 미쓰 김한테 준 상품권도 사실은 그 친구가 보내준 거거든. 그래서 미쓰 김이 가보도록 해.”




“네. 그럼 제가 보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5시 30분에 와 줬으면 하더군. 배열을 잘 해야된다나. 하지만, 한번 둘러보고 오는 거니까. 30분도 안 걸릴꺼야. 그리고 거기서 퇴근하도록 하고.”




“저…동생을 데리고 가야 하니까, 회사에는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고. 이따 갔다와.”




“네. 그럼.”




“아! 미쓰 김”




“네, 상무님.”




“오늘 자네 동생은 어떤 일 하도록 되어 있나?”




“네, 개발팀 결재 문서 정리하고 컴퓨터 입력할 겁니다.”




“개발팀 일은 내일 시키고, 오늘은 내 서류를 좀 정리해야겠어.”




“상무님. 개발부 팀장에게 서류 준비해 놓으라고 말씀드렸는데요.”




“괜챦아. 내가 얘기하지. 내가 좀 급해서 말이야.”




“그래도…”




“아니…왜 이렇게 말이 많지? 자네 내 말 듣지 않을려거든. 관 둬.”




“알겠습니다.”




미스 김은 박 상무의 방을 나가서는 동생을 조용히 밖으로 불러냈다.




“언니, 왜?”




“응, 언니가 오후 늦게 거래처에 갔다올거거든.”




“응, 그래. 언니 올 동안 기다릴게.”




“아니, 기다리지 말고. 퇴근 시간 되면 바로 나가.”




“오늘 개발팀 서류일 끝내야 하는데. 거기 서류 무지 많아.”




“오늘은 상무님 서류 정리할거야. 일이 바뀌었어.”




“퇴근할 때 상무님이 뭐라고 하면 몸이 안좋다고 그래. 생리를 하는 중이라고 하던지.”




“언니도 참…어떻게 상무님한테 생리 중이라고 해?”




“그냥 언니가 시키는데로 해.”




“알았어. 그럼 나 점심 먹고 올게. 딴 친구랑 라면 먹으러 가기로 했다. 거기 라면 디기 맛있데.”




“그래, 가봐. 오늘 되도록 상무님 눈에 띠게 행동하지 말고.”




미쓰 김은 친구랑 라면을 먹기로 했다며 천진스럽게 뛰어 나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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