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험담

재수없는 년과 스토커의 행복 ... -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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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6개월 10일 3시간 25분이 지났다.


옹알이도 못하는 젖먹이 주제에 어른들 노는 판에서 가당키나 한 말이냐고 주억거릴 이도 있을 것이다. 물론 엄마의 자궁을 박차고 나온 갓난아기의 당돌한 출생에 대한 언급이었다면 재론의 가치조차 없다.


6개월 10일 3시간 25분은, 아니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속절없이 흘려보낸 시간이 더 가미돼 6개월 10일 3시간 27분이 되고 말았지만, 진흙탕을 뒹굴기 시작한 내 인생의 분기점이 외나무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


더불어 옴팡지게 재수 없는 그녀와 맞닥뜨린 치욕스러운 사건의 발생 시점과도 오차 범위 내에서 동일하다.




재수 더럽게 없는 그 여자가 지금 놀이터를 지나가고 있다. 나는 몰래 뒤를 밟는다. 상가 슈퍼마켓에 들러 간단한 찬거리를 산 뒤, 비디오 가게에서 테이프를 고를 것이다. 목욕탕은 어제 갔고, 친구들도 엊그제 만났으니 오늘 그녀는 곧장 아파트로 향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양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어기적어기적 걷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노처녀 찜 쪄 먹을 자세다.


나는 이제 미행을 끝내고, 그녀를 덮치기로 한다. 계획은 완벽하다. 사실, 거창하게 계획을 세워 음모를 꾸밀 필요도 없는 상황이다.


한 달 동안 그림자처럼 미행하며 연구, 분석했지만 아무 보람도 없이 그냥 덮치면 되는, 뭐 그렇고 그런 싸가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미스코리아도 한 수 접을 정도로 쫙 빠진 몸매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도도하고 자신만만한 어투, 32살의 여자 과장이라는 놀라운 직책과 세련된 옷맵시. 어디 하나 비집고 들어갈 빈틈이 없어 보였지만, 허점은 의외로 쉽게 드러났다.


그러니까 3일 1시간 10분 전, 수요일 밤의 일이다. 그녀가 쓰레기를 내다버리는 날이다. 제대로 된 스토커라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게 바로 쓰레기다. 쓰레기를 뒤져보면 그 사람의 일상을 단숨에 꿰뚫을 수 있으니 말이다.


횡재수를 한 3일전의 수요일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녀의 쓰레기를 수거해 잽싸게 집으로 가 목욕탕에 풀어놓았다. 도무지 분리수거와는 담을 쌓은 여자라 음식물 찌꺼기가 너저분하게 섞여 있다. 올이 나간 스타킹, 수북한 담배꽁초, 코푼 휴지…… 여느 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쓰레기들이라 적잖이 실망했다.




그 때 눈에 띈 것이 바로 수첩이었다. 손바닥만한 크기에 속지는 대부분 찢겨나간 상태로 휴지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그나마 음식물이 번져 원형을 복원하기가 쉽지 않았다. 수 천 개의 퍼즐을 짜 맞추듯 핀셋으로 수첩 조각을 하나하나씩 집어 올렸다.


이틀 날밤을 샌 끝에 수첩이 제 모양을 되찾았다. 내게 있어 그것은 수첩이 아니라, 한 권의 보물 지도였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복받쳐 오르는 희열을 마음껏 음미했다. 


아마도 그 수첩은 그녀에게 일기장이나 다름없었던 모양인지, 짤막한 내용으로 그녀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콧대 높은 척 오두방정을 떨더니 결국 네 년도 어쩔 수 없이 음탕한 년이구나 싶어 콧노래를 흥얼거렸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 아침부터 최 부장이 내 엉덩이를 주시했다. 배불뚝이 아첨꾼 주제에 눈치하난 타고났다. 얼른 편의점에 가서 팬티를 사 입었다. 김 대리가 쳐다봤다면 얼마나 좋을까? 꿔다놓은 보릿자루라도 그렇게 무심하지는 않을 텐데……






* 오늘도 비디오 가게에 들렀다. 새로 온 아르바이트생은 힘깨나 쓰게 보인다. 밍밍한 로맨스 계열도 이젠 바닥나던 참인데, 장르를 바꿀까 싶다. 아예 노골적으로 빨간 테이프만 골라 볼까! 다음에 배달시키면 꼭 그 애가 와야 될 텐데……






* 내 무덤 내가 팠지! 나 좋다고 따라다니던 남자들, 그 때 못 이기는 척 넘어가는 건데…… 이제 와서 꼬리 내릴 수도 없고…… 휴, 32살 노처녀의 몸부림을 누가 알까? 갓난아기 오줌 누는 고추만 봐도 젖꼭지가 꼼지락거린다.






* 정 실장, 그 자식은 다 좋은데 너무 소심해! 야외 나가 드라이브 하고 밥 먹고, 술 마시고 하면 다음 코스는 다들 알아서 한다는데…… 거기서 대리운전을 부르다니, 줘도 못 먹는 병신! 그나저나 오늘 밤은 또 어쩌나?






* 오이와 바나나만 먹고 사냐는 슈퍼 아줌마 등쌀도 지겹다. 하여간 오지랖도 넓어요. 큰 맘 먹고 기구를 사던가 해야지…… 내 아랫도리를 처음으로 뚫어줄 남자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 숨어 있느라고 이렇게 애간장을 태우는 것일까?






* 이젠 동창 모임도 짜증난다. 신랑이 어떻고, 아기가 어떻고…… 다 좋은데 정력제 얘기만큼은 들어줄 수가 없다.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라는 사이트가 그렇게 대단하다는데, 지금까지 왜 나만 몰랐을까? 선희 그것이 얌전만 빼는 내숭덩어리인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은 겪어봐도 알 수 없는 동물이다.






* ‘**’는 마약이다. 업무 중간에 잠깐씩 훔쳐보는 재미도 여간 쏠쏠하지 않다. 팬티가 축축하게 젖어들고, 숨이 멎도록 심장 박동도 빨라지는 게…… 기어이 화장실에 가서 손가락을 집어넣게 만든다.






나는 그길로 욕실에 달려가 코 푼 휴지를 살펴보았다. 킁킁거리며 냄새도 맡아보았다. 하기야 매일 감기를 달고 살지도 않는데, 휴지를 이렇게 많이 버린다는 게 미심쩍기도 했다.


수첩에 따르자면 보물은 바로 그 재수 없는 년이다. 임자 없는 황무지에 깃발만 꽂으면 되는, 땅 짚고 헤엄치기나 우는 아이 약 올리기보다 쉬운, 말 그대로 단순 작업이다. 32년을 가꿔온 쫄깃쫄깃하고 야들야들한 계곡을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점령하리라!




나는 그녀의 그림자를 밟으며 아파트 입구로 따라 들어간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녀가 흠칫 뒤돌아본다. 나는 태연한 척 무시하고 그녀를 앞질러 간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서 내려오는 중이다.


조금 기다리자니 그녀가 당도한다. 나는 모자를 깊이 눌러쓴다. 혹시라도 모를 그녀의 경계심을 지우기 위해, 나는 잠깐 외출하다 돌아온 아저씨처럼 일부러 츄리닝을 입었다.


그녀는 들고 있는 비닐봉지가 무거운지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바닥에 내려놓는다. 둘 만의 공간에서 나는 그녀의 뒤통수를 째려본다.


6개월 10일 3시간 25분 전, 아니 거꾸로 매달아도 간다는 국방부 시계처럼 그 사이 얼마의 시간이 더 흘러 6개월 10일 3시간 40분 전, 그 때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가 뒤돌아보며 내 심사를 흠집내지만 않았던들 우리는 영원한 타인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나를 그녀의 영역으로 침범하게 만든 그날의 엘리베이터는 인두로 지진 지문처럼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쩌으그, 슨상님……]


[예?]


그 때까지도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긴가민가한 상태로 일단 대답부터 했다. 내가 대답을 했던 이유는 엘리베이터 안에 남자가 2명이었기에, 아니 단언컨대 양복 입은 남자란 7명의 탑승객 중에 나 혼자였기 때문이다.


허둥지둥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누가 불렀는지 확인하고 있는데, 걸쭉한 사투리가 다시 한번 뒷덜미를 낚아챘다.


[엉덩이 쪼매만 돌리시쇼, 잉~]


[아, 예에……]


[냄새가 솔잔히 거시기 하네요! 아따, 점슴 때 뭘 드셨는게라?]


뒤돌아보니 대걸레를 든 빌딩 청소 아주머니가 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었다. 순식간에 누명을 뒤집어 쓴 셈이다. ‘방귀 안 꼈어요!’라고 대꾸할 새도 없이 얼굴부터 붉어지고…… 


이 아주머니가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뒤집어씌우나 두 눈만 씀벅거렸다.




[키득…… 키득……]


[푸후…… 푸훗…… 호호……]


나를 제외한 6명은 정말 냄새라도 나는 듯이 코를 쥐어 막으며 일제히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아주머니! 제가 무슨…… 왜 생사람 잡고 그래요?]


얼른 수습해 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비 맞은 생쥐처럼 꼼짝없이 구석으로 찌그러져 엘리베이터가 서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10, 11층이 그냥 통과된다. 계기판을 보니 15층의 버튼에 불이 들어와 있을 뿐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홧홧거려 더 이상 타고 있기가 거북했다.




아무 층에나 내려야겠다 싶어 발걸음을 떼는데, 검은 정장 차림의 여자가 뒤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로 복장을 긁는다.


[슨상님! 그냥 계세요. 제가 눌러 드리죠. 점슴 때 좋은 걸 드셨나 봐요. 그런대로 참기 힘든 정도는 아니네요! 호, 호, 홍……]


청소 아주머니의 사투리까지 흉내를 내는데, 두 눈 질끈 감고 뺨 한 대 갈겨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그러나 어쩌랴? 상대는 연약한 여자가 아닌가!


13층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무작정 내려버렸다. 난감했다. 이 빌딩 자체가 처음 와 보는 곳이라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다. 어쩔 수 없이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25층의 비서실에 올라가 서류 한 장만 건네주면 되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심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자니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생각할수록 검은 정장 차림의 여자가 괘씸해졌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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